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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Jan 08. 2017

우리는 나약할까

정말?



다카하시 마츠리 씨는 일 때문에 자살했다. 그는 일본 최고 대학인 도쿄대를 졸업해 일본 최고 광고회사 덴츠에 들어갔다. 마츠리 씨는 꿈의 직장인 덴츠에서 한 달에 최대 130시간의 잔업을 해야 했다. 일 바깥으로 요구되는 것도 많았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 마음을 풀을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최소한으로 잘 시간도 모자랐으니까. 그게 1년쯤 반복되자 마츠리 씨는 사택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엄마에게 “소중한 엄마. 인생도 일도 모두 힘듭니다. (딸의 자살에 대해)자신을 탓하지 마세요. 최고의 어머니”라는 글을 남기고. 


마츠리 씨의 트위터 멘션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널리 퍼졌다. 그녀의 이름과 정확한 사연을 몰라도 그녀의 멘션을 본 사람은 많을 것 같다. “자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감정이 다 사라졌다.” “매일 다음 날이 오는 게 무서워서 잘 수 없다.” “이런 스트레스 가득한 하루하루를 버티면 앞에 뭐가 남아 있을까.” 일의 압박은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마츠리 씨는 안타까울 정도로 뚜렷한 증거가 되었다. 


마츠리 씨가 받은 압박은 남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도 일 때문에 피곤하다. 일 때문에 압박을 받는다. 일 말고도 회사의 문화, 말이 통하지 않는 상사, 시누이처럼 미운 동기, 이런 요소들이 우리의 정신을 압착기처럼 찍고 누른다. 짜증이 늘고 잠이 줄어든다. 식욕이 줄어들거나 폭식을 하고 만다. 내가 점점 망가진다는 기분이 들지만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는 알 수 없는 날이 이어진다.


마츠리 씨의 트위터 맨션을 보면 그가 받은 압박의 종류를 알 수 있다. 그 압박의 종류는 다양하면서도 전형적이다. 직장에 다니는 젊은이가 받을 수 있는 압박 모듬같다. “너의 잔업시간인 20시간은 회사에게 있어선 쓸모 없다.” → 일이 많고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아무리 연공 서열이어서 직위가 자동으로 오른다고 해도 말이야. 상식을 벗어난 것을 말하면 안 되잖아.” → 손쉽게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이 직장생활을 어렵게 만든다. “하루에 2시간밖에 잘 수 없다” → 육체적으로 피로하다. 특히 수면부족은 판단력을 낮추는 가장 큰 요인이다.


젊은이들이 받는 압박을 말하면 “우리 때는 더한 것도 견뎠다”는 말을 하는 어른들이 있다. 20세기의 사람들이 지금과는 양적, 질적으로 다른 굉장한 압박을 받았던 건 사실이다. 세계 대전, 대학살, 원자폭탄 등의 전지구적 이벤트가 여기저기서 폭탄처럼 터졌다. 20세기 사람들은 그걸 잘 견뎌냈을까? 그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어차피 사람들의 정신적 내구성의 평균치는 비슷하다. 실험쥐 중에서는 핏줄에 더 많은 알콜을 주입해도 유독 튼튼한 쥐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육체적, 정신적 충격에 강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PTSD는 20세기라는 특수 상황이 만들어낸 현대의 정신병이다. 물론 세상엔 제정신을 박살내면서까지 일을 통해 성과를 내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자유쯤은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마츠리 씨가 일하던 덴츠 특유의 기업문화가 다카하시 마츠리 씨의 자살이 영향을 미쳤다는 말도 있다. 덴츠에는 ‘귀십칙’이라는 섬뜩한 십계명이 있었다. 귀십칙은 ‘늘 머리를 회전시켜 모든 방면에 신경을 쓰고 한치의 틈도 있어서는 안된다. 서비스는 그런 것이다.’ 처럼 근성 넘치는 규율이다. 말이 좀 심해서 그렇지 100% 틀린 말이라고 볼 순 없다. 모든 걸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자영업자라면 저 수준의 긴장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생직장과 고용보장이 깨진 지금 직원에게 저 정도의 긴장을 요구할 수 있는 회사는 없다. 덴츠도 마츠리 씨의 죽음 이후 귀십칙을 삭제했다.


정말 우리가 나약할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영아사망률이나 문맹률 등의 지표에서 우위를 보이는 건 사실이다. 이른바 제 1 세계 기준으로 물리적 생존이 조금 더 쉬워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그만큼 질적으로 다른 경쟁과 압박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도 사실이다. 학력 인플레이션이나 고용안정성의 극적인 하락, 늘어난 평균 수명과 줄어든 노동 연령, 평균적으로 높아진 자존심과 그를 따를 수 없는 현실에서의 수입 등, 지금은 여러 모로 지난 세기와 다른 압박이 사람들을 파고든다. 


오히려 내가 기분나쁘게 여기는 건 21세기까지 살아남은 20세기의 수혜자들이다. 20세기엔 정말 굉장한 것들을 견디며 대단한 것들을 이룬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 덕분에 이른바 제 1 세계는 대단한 호황을 이뤘고, 그때의 호황이 군불처럼 남아 아직 21세기를 덥히고 있다.반면 눈을 떠보니 귀족의 아들이었던 것처럼 20세기라는 호황 안에서 편안하게 생존한 사람들이 있다. 사실 지금의 젊은이에게 “우리 때는 더한 것도 견뎠다”는 사람들은 격동의 시기를 편안하게 보낸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정말 사선같은 시간을 보낸 사람은 자신의 성공이 자기가 잘 해서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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