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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Feb 03. 2017

혁신의 맛

발뮤다 더 토스터는 뭐가 다를까


'혁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생명 연장. 화성 진출. 만능 기계. 첨단 기술이 삶을 극적으로 향상시켜줄 거라는 종교적인 믿음. 기술 덕분에 우리는 행복해진다는 상상. 민주주의나 자연환경 등 숭고한 것들이 뿅 하교 지켜지는 세상. 그게 뭐든 굉장히 거창하다.


정말 혁신적인 기술이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까? 길어진 평균수명은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노년이 길어졌음을 의미한다. 항공기술과 정보기술로 발달한 초연결사회는 초양극화를 불러온다. 게다가 우리는 여전히 변함없이 잠을 안 자면 졸리고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프다. 먼지와 추위에 약해서 겨울이 되면 다른 동물의 털을 덮어쓰고 마스크를 써야 한다.


생명 연장이나 화성 진출 같은 거시적 혁신은 확실한 문명의 진보다.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대승적 발전이다. 내가 인류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기뻐질 정도다. 다만 우리의 생활에 바짝 붙어서 일상의 결을 바꿔주는 미시적 혁신 역시 혁신이다. 더기어가 사랑하는 생활가전의 명가 LG전자가 누군가에게는 테슬라보다 훨씬 중요하다. 리콴유 역시 꼽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으로 에어컨을 꼽았다.


그래서 나는 테슬라가 아니라 발뮤다 토스터를 이 시대의 아이콘이라 주장하려 한다. 발뮤다는 동양의 다이슨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생활가전 업계에서 주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어냈다. 이들에게는 확실한 공통점이 있다. 혁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곳에서 혁신의 실마리를 찾아냈다는 점.

 

생활가전 영역은 기존의 대형 가전 업체들이 완성시킨 시장으로 간주된다. 기술보다는 애프터서비스가, 브랜드 이미지보다는 유통이, 디자인보다 가격 경쟁력이 더 중요하다. 여기서 소형 신규 진입자가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단가를 낮춘 저가형 제품뿐이었다. 마트 전자제품 코너 맨 끝의 저렴한 비 브랜드 제품이 이에 해당한다.


발뮤다는 반대의 길을 갔다. 방법론이 다이슨과 비슷했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해 집어넣는다. 디자인 레벨과 표면처리 등 겉으로 보이는 미적 요소도 향상시킨다. 그만큼 가격도 올린다. 가격경쟁력과 유통망으로 승부하던 세계에서 다른 카테고리의 물건을 내세운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발뮤다 더 토스터는 보통 토스터보다 몇 배나 비싼 30만원 이상의 가격대에도 아랑곳없이 잘 팔린다. 물론 가격이 비싼 만큼 업계 1위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시장의 소수자가 공룡처럼 거대한 시장의 경쟁자들 사이에서 자기의 색을 냈다. 판매수치나 영업이익 등의 딱딱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아도 성공이라 부르기 충분하다.


발뮤다 더 토스터에는 성공 주변에 으레 있는 탄생설화가 있다. 2014년 5월 발뮤다는 회사 근처 공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비가 왔는데도 천막을 치고 진행했다고 한다. 직원들이 별로 안 좋아했을 것 같지만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어려운 법이다. 아무튼 토스터를 개발하던 때라 누군가 “숯불에 빵을 구워 보자”고 제안했다. 오, 맛있었다. 데라오 사장은 숯불 때문에 맛있었나 싶어서 회사로 돌아와 숯불에 계속 빵을 구워 봤다. 그 맛이 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바비큐 파티를 한 날은 비가 왔어요.”


발뮤다 더 토스터의 첫번째 마법은 물이다. 잘 아시다시피 보통 토스터는 빵의 양쪽 면을 똑같이 가열한다. 빵 안에 들어 있는 물이 마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토스터에 바짝 익힌 식빵은 선도와 상관없이 낙엽처럼 마른다. 이걸 해결하면 맛있는 토스터를 만들 수 있다.


테라오 사장은 그 깨달음 이후로 도쿄 시내의 빵집 주방을 찾아갔다. 거기서 빵 굽는 기계의 스팀 조절 기능을 확인했다고 한다. 바비큐 파티→숯→물→빵집 주방이라니 처음부터 빵집으로 가시면 어떠셨을지 싶기도 하지만 세상엔 지나고 나야 아 이랬구나 싶은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발뮤다 더 토스터 안에는 5cc 용량의 작은 컵이 들어 있다. 이 컵에 물을 담아 흡입구에 넣으면 본체 안이 수증기로 꽉 찬다. 물은 공기보다 빨리 가열되기 때문에 빵의 표면이 살짝 익으면서 안쪽에 남아 있는 수분과 기름기가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발뮤다 더 토스터에는 보통 토스터와 달리 문 앞에 히터가 하나 더 있다. 증기를 만드는 데 쓰는 보일러 히터다.

 

발뮤다의 두 번째 비결은 온도조절 기술, 정확히 말하면 실험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로 뽑아낸 프로그래밍이다. 요리를 해 보셨다면 알 텐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요리 온도를 바꿔줘야 할 때가 있다. 발뮤다에는 그 프로그래밍이 내장되어 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빵의 풍미를 되살리는 60도까지 온도를 올린다. 다음에는 표면이 노랗게 그을릴 정도의 160도까지, 마지막에는 살짝 탄 자국이 보이는 220도까지 온도가 올라간다. 이 물건을 소개한 기사에서 보이는 ‘5000장의 토스터를 구웠다’는 건 이 최적의 프로그래밍을 위한 노력의 결과다.

 

이런 식의 단순 반복을 통한 결과 산출이 정말 중요하다. 보일러 히터를 별도로 집어넣은 건 혁신의 밑단일 뿐, 진짜 맛있는 빵이라는 결과물을 만들려면 온도 조절이라는 변인을 계속 바꿔 가면서 실험에 의한 데이터를 구축할 수밖에 없다. 디자인 등의 눈에 보이는 것만 좇다 보면 진짜 경쟁력을 잊는다. 리모와를 쓰다 보면 정말 좋은 건 요철 알루미늄 케이스가 아니라 안에 들어 있는 수납의 인터페이스와 부드러운 바퀴다. 발뮤다 더 토스터에는 토스트, 치즈 토스트, 프랑스 빵, 크루아상이라는 4가지 빵 굽기 모드가 있다. 이만큼의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라면 몇천 장의 빵을 구웠다는 이야기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기술이 담긴 그릇이라 할 만한 디자인 역시 훌륭하다. 발뮤다 더 토스터의 디자인 기반은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다. ‘청어 파이를 만들어서 손자에게 전해주는 할머니 집에 있는 문 달린 장작 화덕’이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장소’로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고 한다. 깊은 고민 끝에 나온 특징적인 디자인이다. 쓸데없어 보일 정도로 자세하다는 점 역시 일본스럽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장소. 나는 이게 발뮤다가 기술을 익히고 빵을 익히는 데이터를 쌓고 애니메이션을 참고해 디자인을 뽑아낸 물건을 만든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는 별개로 우리는 여전히 배가 고프면 기분이 상하고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수명이 길어지는 것도 맛있는 걸 더 많이 먹고 싶어서, 화성에 가는 것도 더 많은 사람이 공평하게 맛있는 걸 먹게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발뮤다 더 토스터 역시 어느 정도는 사람들의 더 나은 생활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테라오 겐 사장도 1991년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지중해 연안을 도는 방랑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17살 때. 헤밍웨이가 좋아서 투우 마을인 안달루시아의 론다에 갔다. 말라가에서 버스 터미널을 찾아 4~5시간 동안 산길을 오르는 버스를 타고 버스에서 1시간쯤 걸어 론다 시내로 내려갔다. 지쳤고, 몹시 배가 고팠고, 외로웠다고 한다. 무턱대고 스페인어도 모르는 채 스페인에 온 상황, 그때 마을 한 구석에서 좋은 냄새가 풍겼다. 갓 구운 빵 냄새. “몇 페세타?”라는 말도 못 해서 겨우겨우 작은 시골 빵을 받아서 먹은 순간.


그는 그때 우르르 눈물이 났다고 한다. 기대, 불안, 피로, 긴장이 눈물과 함께 나왔다고. 거기서 그는 깨닫는다. 음식을 몸에 넣으면 힘이 나온다. 그런 식의 당연한 사실을 극적으로 느끼는 건 한 사람의 삶에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4년이 지난 2015년 도쿄에서 토스터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그 연설을 한 걸 보면.


그는 이 프레젠테이션의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침 빵이 맛있으면 아침이 즐거워진다. 아침이 무척 즐거우면 그렇지 않은 날에 비해 몹시 좋은 날이 된다. 전하고 싶은 건 좋은 하루의 기점이다.” 진심이든 판촉용 멘트든, 이런 식의 생각을 품고 기계를 만드는 건 꽤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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