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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Nov 12. 2017

몰스킨과 캐리비안의 해적

사업한다면 이들처럼

낡은 공책과 손글씨. 몰스킨의 판타지. 


피카소와 헤밍웨이와 브루스 채트윈은 몰스킨 브랜드 공책을 쓰지 않았다. 굿이어 웰트가 구두 제법의 이름이듯 몰스킨도 그냥 공책 제법의 이름이다. 그러니 몰스킨의 광고 문구인 ‘전설적인 공책’은 지금의 몰스킨 공책과 큰 상관이 없다. 몰스킨을 다룬 대부분의 영어권 언론 기사 역시 허구에 가까운 이들의 전설을 지적한다. 몰스킨이 진짜 흥미로워지는 건 바로 여기서부터다.


“과장이에요. 마케팅이고, 과학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구요.” 몰스킨은 탄생 설화에 뚫린 구멍을 순순히 인정한다. 이건 2004년 <뉴욕 타임즈>에 실린 모도&모도의 마케팅 총괄 프란체스코 프란체스키가 ‘헤밍웨이, 피카소, 그리고 채트윈의 전설적인 공책’이라는 몰스킨의 광고 문구에 대해 한 말이다. 그럼 이게 다 뭘까? 사람들이 속은 걸까? 그나저나 모도&모도는 어디일까? 이를 알려면 몰스킨 브랜드의 짧은 역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정말 짧으니까 지루할 거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시작은 1997년이다. 밀라노에서 나고 자란 마리아 세브레곤디는 영국 작가 브루스 채트윈의 <송라인>을 읽고 있었다. 소설 속에는 파리에서 몰스킨 제법 공책을 찾아 헤매는 작가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녀는 소설 속 공책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세브레곤디는 이탈리아의 작은 디자인 회사 모도&모도에 제안해 ‘몰스킨 스타일’ 공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일이 너무 커졌다. 1997년 모도&모도가 만든 첫 몰스킨은 5천부였는데 다음 해에 3만 부를 찍었다. 2004년에는 일본을 시작으로 아시아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2006년 사모펀드가 몰스킨을 만든 모도&모도를 인수했다. 2011년에는 공책의 캐릭터를 입힌 여행용품을 출시했다. 2013년에는 이탈리아의 보르사 이탈리아나에 상장했다. 지금 몰스킨은 전 세계 92개국, 2만개 이상의 판매처에서 팔려나간다. 연간 성장률은 꾸준히 25%라고 한다. 


<캐리비안의 해적>이 떠오른다. 이 히트 영화 시리즈의 원작은 불길한 바닷가가 아니라 지루할 정도로 햇살이 넘치는 캘리포니아에 있다.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 있는 디즈니랜드의 장수 놀이기구가 캐리비안의 해적이다. 미국 테마파크 놀이기구의 줄거리에 유럽 뱃사람의 전설을 붙였고, 전설을 붙인 놀이기구에 영화의 줄거리를 붙여서 국제적 규모의 문화상품이 만들어졌다. 옛날 전설에는 주인이 없으니까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다. 


몰스킨도 그렇다. 이탈리아에서 디자인하고 중국에서 생산한 공책에 작가와 창작자의 낭만을 붙여 국제적인 단위의 히트 상품이 만들어졌다. 사라진 공책 제법엔 주인이 없으니까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다. 교훈적이다. 역시 장사는 당당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손님들은 바보가 아니다. 소비자가 단순히 '스토리텔링 마케팅'에 빠져서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거나 몰스킨을 좋아하는 거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람들은 <캐리비안의 해적>의 오리지널리티나 몰스킨의 뻔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물건 자체의 가치와 상징에 집중한다. <캐리비안의 해적>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잭 스패로우라는 새로운 타입의 영웅이다. 그런 식의 영웅이 필요하던 시기에 조니 뎁이 나타난 것이다. 몰스킨도 마찬가지다. 몰스킨이 성공한 이유 역시 사람들이 원하던 뭔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몰스킨을 관통하는 질문은 조금 달라져야 한다. ‘몰스킨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었나?’

 

내가 뭔가 된 듯한 기분 아닐까? <가디언>의 2012년 기사는 이 부분을 파고든다. “당신이 (몰스킨에)쓰는 건 최고로 머리 나쁘고 사소한 거겠지만 (몰스킨에 뭔가 쓰면) 헤밍웨이랑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기사에 등장하는 디자인 비평가 스테판 베일리의 말이다. 못된 말이지만 틀렸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는 몰스킨을 쓰는 스스로를 조금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10파운드 정도로 살 수 있는 공책 중 몰스킨 정도 되는 건 많지 않아요. 나는 어쩔 수 없이 몰스킨을 사요. 한방에 뭔가 대단한 걸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줘요.” 세상에 그런 공책은 없다. 몰스킨은 세상에 없는 기분을 파는 데 성공했다. 


나는 몰스킨의 성공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몰스킨은 퇴화하는 종이 기반 기업 사이에서 거듭 성장하는 거의 유일한 회사다. <뉴요커>의 2015년 기사에 따르면 미국 최고의 사무용품 판매 체인점 스테이플스는 매장 200개를 닫는다고 한다. 뉴욕의 고급 문구점 케이트 페이퍼리에도 5개였던 매장을 1개로 줄인다. 200년간 이어진 고급 지류 회사 크레인& 코 역시 미국 정부에 지폐 인쇄 재료를 납품하는 사업으로 회사를 지속시키고 있다. 해적 영화의 연이은 실패 사이에서 성공한 <캐리비안의 해적>처럼 몰스킨 역시 홀로 성장하고 있다. 불타듯 사라져가는 다른 종이 회사 사이에서, 그것도 아주 큰 규모로. 비결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몰스킨 창립자 마리아 세브레곤디는 나와의 메일 인터뷰에서 몰스킨 공책의 3요소를 알려 주었다. 뛰어난 디자인과 품질, 영감을 부르는 이야기, 애호가 집단. 이 셋은 빼어난 선순환을 이룬다. 디자인과 품질과 낭만적인 이야기가 묶인 몰스킨 공책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학력과 자의식이 높은 몰스킨의 타겟 소비자들이 몰스킨 공책에 뭔가를 그리고 쓰면서 자신들의 자아를 표현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몰스킨 베이스 콘텐츠가 웹에 올라간다. 결과적으로 몰스킨은 일종의 취향 공동체가 되어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몰스킨도 ‘디투어’라는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예술가, 건축가, 영화감독,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가 몰스킨을 캔버스 삼아 만들어낸 ‘아트워크’를 보여주었다. 이런 전시의 효과는 분명하다. 사이즈와 판형이 다양한 몰스킨 라인업을 우르르 소개하면서 그 위에 만들어진 작업물을 통해 일반 소비자에게 사용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오프라인 행사로 사람들의 관심과 행동을 유발시킨다. 전시가 진행된 도시도 상징적이다. 런던, 뉴욕, 파리, 이스탄불, 도쿄, 베니스, 상하이, 베이징. 국제화 수준이 높은 대도시. 몰스킨의 타겟 소비자가 많이 살 법한 곳이다.


현재의 인터내셔널 브랜드는 일률적으로 팬 문화 기반의 플랫폼 비즈니스 형태로 진화한다. 생산자 입장에서 팬은 중복 구매자 겸 자발적 광고판이다. 이들이 구입한 물건을 통해 추가로 뭔가 하고 즐거움을 느껴서 그걸 남들에게 알릴 때 비즈니스는 나선형 선순환을 그리며 성공한다. 라이카가 그렇고 스타벅스가 그렇고 무엇보다 애플이 그렇다. 몰스킨도 그런 브랜드다. 몰스킨은 공책의 둥글둥글한 모서리와 이들의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시장의 흐름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몰스킨이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콜라보레이션과 디지털화는 모두 마리아 세브레곤디가 언급한 몰스킨 공책의 3요소에 포함된다. 


몰스킨은 물리적인 종이 뭉치에 손으로 쓴다는 일의 본질적인 즐거움에서 출발한다. 쓴다는 것이 어떤 정신적인 만족감을 주는지, 동시에 어떤 세속적인 우월감을 주는지. 동시에 몰스킨은 스스로의 성공 비결과 향후 방향도 확실하다. 누가 몰스킨을 찾는지, 그들이 몰스킨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몰스킨은 그들에게 무엇을 주는지. 이어지는 마리아 세브레곤디와와의 인터뷰에서 몰스킨이라는 흥미로운 브랜드의 흥미로운 성공 비결을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오디너리 매거진에 실린 원고입니다. 다음에는 마리아 세브리곤디와의 인터뷰가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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