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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May 04. 2018

HBC의 독립서점

해방촌에 대하여


누군가 현대 서울을 보여달라고 한다면 나는 그를 해방촌에 데려갈 것이다. 해방촌에 가는 여러 방법 중 특히 서울역 근처 갈월동 정류장에서 용산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함께 갈 것이다. 그 버스의 노선과 풍경 안에 해방촌을 둘러싼 서울의 역사가 담겨 있다.


한국인이라면 해방촌이라는 이름에서부터 해방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대일본제국의 패망이자 한국인에게는 해방인 1945년 8월 15일 이후를 말한다. 해방 이후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과 북한 지역에서 넘어온 사람과 한국전쟁의 피난민 등이 겹쳐 서울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지금 해방촌은 일본군의 사격 연습장 부지에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해방촌은 서울 중심부의 서민적 동네였다. 


서울의 다른 서민 동네와 해방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외국인이다. 이태원과 가깝고 지리상 서울 중심지에 위치하는데 집값도 별로 안 비싸서 해방촌에는 외국인이 많이 산다. 해방촌의 외국인은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외국인 밀집지역은 이국적인 느낌이 난다. 도시의 비슷비슷한 이미지와 다른 이국적 이미지는 젊은이를 끌어들인다. 젊은이들이 많아지면 동네에 젊은 기운이 생기고, 그 기운을 형상화한 듯한 젊은 느낌의 가게가 생긴다. 해방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오늘의 주인공인 독립 서점이 생긴 것이다. 세 개나.


21세기에 독립 서점이 생길 법한 동네는 따로 있다. 독립 서점에서 파는 책은 특수한 상품이다. 좀 다른 느낌의 소규모 문화상품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 물건은 예민한 젊은이들이 자주 오는 동네에서 팔릴 거라 생각하기 쉽다. 서울의 독립 서점은 실제로 그런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홍대 지역이나 시청 근처 지역에 자리잡았다. 문화시설이나 갤러리가 몰린 곳과 독립서점 밀집지역은 어느 정도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경향은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경향과 고정관념은 아무렇지도 않게 깨질 수 있다. 테이트 모던처럼 강가의 발전소가 현대 미술관이 되기도 한다. 그 판단의 주체가 누구든, 그 판단의 정황이 어땠든, 의외의 판단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2012년 처음 문을 연 해방촌의 스토리지북앤필름이 그런 경우다. 스토리지북앤필름은 해방촌에 자리잡은 첫 독립서점이다. 서점과는 어울리지 않는 경사진 도로 옆에 있다. 주변에 문화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젊은이들을 쏟아내는 대학도 없다. 여기에 차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우연이었어요. 차 타고 지나가다가 봤어요." 스토리지북앤필름 대표 강영규(Kang Young Gyu, 姜泳圭)가 회상했다. 그는 은행원이었다.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고급 직종이다. 하지만 그는 은행 일에서 만족하지 못했다. "그 직장은 너무 미래가 뻔히 보였어요. 좋아하는 점장님이 회사 사정으로 해고당하는 걸 보니까 제 일을 찾아야겠다 싶었어요." 책과 필름이라는 이름처럼 그는 처음엔 책과 카메라를 함께 취급했다. 거기 더해 그는 책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자기 책을 팔 곳이 없어서 서점을 냈다. 스토리지북앤필름의 시작이었다. 


"제가 책을 팔 곳이 없어서 시작했으니까 저는 최대한 독립서적 만드는 사람들의 책을 다 받아줘요." 독립서점의 매력은 각 서점마다 주제가 다르다는 점이다. 한국은 인터넷쇼핑이 발달한 나라다. 인터넷쇼핑이 발달하자 동네마다 있던 서점이 거의 다 사라졌다. 규모의 경제를 당할 수 없었다. 동네 서점이 사라지던 그 시점에 독립 서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독립 서점은 규모의 경제 대신 취향의 경제에 집중했다. 무엇을 파는지, 아니면 이곳에만 있는 게 무엇인지가 더 중요했다. 스토리지북앤필름의 주제는 독립서적이었다. 강영규의 체험에서 시작된 주제가 이곳만의 주제가 되었다. 실제로 스토리지북앤필름에서는 보통 서점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실험적인 책이 많다. 완성도나 재능이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부족한, 끓고 있는 듯한 창작 욕구가 보이는 책을 볼 수 있다.


자기 경험에서 취향이 시작된다. 그 취향 따라 책이라는 물건을 들인다. 스토리지북앤필름의 원칙은 독립서점의 중요한 가치를 보여준다. 모두의 사정과 취향은 다르다. 대형 서점을 비롯한 대형 유통시설은 그 사정과 취향을 최대한 공평하게 보여준다. 덕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이 모이는 대신 개성은 떨어진다. 사람은 개성에 마음이 쏠리기도 한다. 독립서점이 생길 수 있는 이유이자 한 동네에 여러 개의 독립 서점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다. 해방촌에도 스토리지북앤필름이 만들어지고 독립서점이 더 생겼다.


스토리지북앤필름에서 책을 계산하다 보면 계산대 왼쪽에 A4용지가 한 장 붙어 있다. 이웃 헌책방 별책부록으로 가는 지도다. 그 지도를 따라 좁은 골목을 지나 5분 정도 걸어가면 별책부록이 보인다. 독립서점 하나를 다 봤는데 굳이 또 다른 서점에 가볼 필요가 있을까? 뭐가 다를까?


"(여기 있는 책은)제 취향에 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죠." 별책부록 대표 차승현(Cha Seunghyun車昇泫) 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별책부록의 책은 스토리지북앤필름의 책과 좀 다르다. 독립서적이 가장 많은 스토리지북앤필름의 책에 비해 별책부록의 책은 더 계통이 다양하다. 독립서적도 있으나 일반 출판사의 책도 있다. 일반 출판사 중에서도 큰 출판사의 책도 있고 1인 출판사의 책도 있다. 헌 책도 있고 새 책도 있다. 한국 책이 많은 가운데 외국 책도 있다. 경우에 따라 모호해 보일 수도 있는 별책부록의 책 기준은 하나 뿐이다. 주인의 취향. 덕분에 별책부록은 서점인 동시에 누군가의 서재를 보는 듯한 흥미를 준다.  


별책부록이 해방촌에 자리잡은 이유 역시 우연이었다. 차승현은 경복궁 쪽에 있었고 지금은 없어진 독립서점 '가가린'에서 일했다. 가가린을 그만두고서는 별책부록을 차렸다. 별책부록은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상권인 홍대 지역에 있다가 해방촌으로 왔다. 해방촌 말고 고민했던 다른 곳도 있었다. 선택지 중에서 차승현은 현실적인 대안을 택했다 "월세가 저렴했던 것도 무시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중요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하는 서울에서 해방촌의 20세기 후반 주택가 분위기는 고유한 특징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동네의 이미지 역시 독립서점이라는 개별 브랜드의 이미지에 일조할 수 있다. 차승현 역시 그러한 특징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언젠가 해방촌을 떠날 수도 있겠죠. 사실 저도 곧 이 자리를 벗어나 이사를 가요. 하지만 해방촌의 중심지인 해방촌 오거리에서 더 가까운 곳이에요."


사실 서울 사람들에게도 해방촌은 익숙하지 않다. 해방촌은 지도상 입지는 좋지만 길이 좁고 주차가 어려워서 갈 이유가 별로 없다. 이미지는 좋지만 가기 힘든 동네에 독립서점이 있다는 건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별책부록의 매출은 자신들의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서도 많이 이루어진다. 한국은 인터넷 사업 전개가 쉬울 뿐 아니라 택배가 굉장히 저렴하고 빠르다. 소규모 사업자도 이러한 사업망을 이용해 인터넷 기반 사업을 전개할 수 있다. 그러니 서점이라는 공간은 책이 팔리는 유통매장일 뿐 아니라 서점이라는 브랜드의 쇼룸이 되기도 한다. 패션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건축과 입지에 모두 공을 들인다. 서울의 독립 서점 역시  공간과 입지 자체를 서점이라는 브랜드의 이미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제 고요서사에 가볼 시간이다. 별책부록과 비슷한 시기인 2015년에 고요서사도 생겼다. 고요서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독립서점의 이미지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고요서사의 대표는 출판사 편집자였다. 주로 사회과학 책을 편집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전시하고 팔기 위해 독립서점을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서사'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주로 문학에 집중한다. 고요서사에서 판매하는 800여 종의 책 중 대부분이 소설, 시, 에세이다. 대형 서점의 문학 코너를 빼온 후 더 예쁘게 다듬었다고 볼 수도 있다.


"우연에 가까웠어요." 고요서사 대표 차경희(Cha Kyunghee, 車璄熙) 도 해방촌에 자리잡은 것에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다음 말이 흥미로웠다. "다른 서점이 있는 게 도움이 돼요. 해방촌은 (교통이 편한 동네가 아니라서)마음 먹고 와야 하니까요. 한번 온 김에 다른 서점도 둘러보고 가는 거죠." 취재를 갔던 날에 마주쳤던 손님들이 증거였다. 스토리지북앤필름에 들렀다가 고요서사에 갔는데 똑같은 손님 팀을 만났다. 그들은 서점에 들를 때마다 책을 한 권씩 사 갔다. 모이는 건 좋은 것이다.


"그런데 사업은 되나?" 당신이 지금 업무 출장 중에 비행기를 타고 이 글을 읽는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사람들이 가기 쉽지도 않은 곳에서, 요즘 전 세계적으로 위기라는 오프라인 서점을 운영하는데, 그것도 소규모로, 잘 될까? 차경희의 말이 좋은 답이 될 것 같다. "항상 소수의 독자는 있다고 이야기해요. 한국 문학의 경우는요. 한국 문학이라는 장르가 생겼다고도 하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책을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판매하는 게 의미가 있어요." '시장조사는 필요없다'라는 스티브 잡스의 선언과 큰 차이가 없다.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진 해방촌의 독립서점 셋은 한 달에 한 번씩 늦게까지 문을 연다. 해방촌 심야책방이다. 이들은 약 1년 전부터 매월 첫째 주 수요일은 밤 12시까지 문을 열기로 했다. 셋 중 해방촌에 가장 먼저 자리잡은 스토리지북앤필름이 제안했고 나머지 두 서점도 흔쾌히 수락했다. “저희와 별책부록은 문을 일찍 닫아요. 그래서 직장인들은 오고 싶어도 올 시간이 없었어요. 한 달에 한 번쯤은 늦게까지 일해서 손님들을 만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강영규가 떠올렸다. 미술관 야간 개장과 비슷한 개념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늦게까지 일하는 건 부담이 없으니까요.” 차경희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부정기적이지만 이벤트를 하기도 해요. 찾아 오시는 분들께 샹그리아를 드리기도 하고, 뱅쇼나 커피를 드리기도 해요.”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기억해도 좋을 날이다. 서점도 좋지만 해방촌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은 무척 훌륭하기 떄문이다.


해방촌은 그 자체로 서울의 20세기와 21세기라는 시대의 무늬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저소득자층의 일본군 사격장 부지 무단점거로 동네가 생겨났다. 그 동네는 한국 최대의 시장인 남대문시장 근처에 있어서 경제성장 초기의 수제 경공업인 봉제업이 이루어졌다. 한국이 중화학공업 위주로 경제 모델을 변경할 때쯤 한강 남쪽을 중심으로 신도시형 아파트단지가 생겼다. 그 과정에서 해방촌의 발전은 정체되어 길이 좁은 주택가로 머물렀다. 한국이 잘 사는 나라가 되면서 세계에 물건을 팔기만 하던 한국 사람들이 세계에 직접 나가서 넓은 세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선진국형 도시재생 모델을 보고 온 사람들이 해방촌처럼 오래된 동네의 멋을 다시 찾아냈다. 멋을 찾아내자 건물주들은 그 멋에 비싼 값을 붙였다. 60년 전에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데다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기까지 한 나라가, 선진국형 현상인 젠트리피케이션을 고민해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해방촌의 독립서점은 그 현상의 트로피같은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는 곳이라면 으레 멋진 커피숍과 세련된 식당과 함께 독립 서점들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동양을 찾아온 대항해시대의 서양 무역선에 늘 선교사가 타고 있던 것처럼. 


서울의 마을버스는 대중교통망의 모세혈관 역할을 한다. 해방촌에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기도 하다. 서울역 근처 갈월동에서 용산 02번을 타고 '신일교회' 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스토리지북앤필름이 있다. 스토리지북앤필름에서 시작해 별책부록을 거쳐 고요서사까지 구경한 후 큰길을 지나 해방촌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유흥가인 이태원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이 서울에 관심이 있다면 용산 02번을 타고 해방촌에 가보시라고 할 것이다. 당신이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이라도 상관없다. 구글 맵에는 마을버스도 표시된다.



몇달 전 대한항공 기내지 <모닝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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