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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May 25. 2017

호스피털리티의 냄새

오래된 호텔의 향기에 대하여



새로 지어 반들거리는 호텔엔 별 매력을 못 느낀다. 진짜 사치스러운 가치는 시간이 흐르며 쌓인다. 시간은 가장 엄정한 심사위원인 동시에 어색한 새집 냄새를 날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여기에 오래 공들인 건물 관리가 더해졌을 때 꽤 좋은 냄새가 난다. 나는 그걸 호스피털리티의 냄새라고 부른다. 그 향을 좋아한다.


초고급호텔이 될수록 작은 부분까지 신경 쓴다. 고객 연필의 방향까지 늘 똑같다. 눈에 안 보이는 향이라고 안 챙길 리 없다. 특급 호텔의 객실 문을 열 때, 복도의 코너를 돌 때 나는 은은한 향기는 세세한 호텔 이미지 전략의 일부다. 최고급 사치품엔 그게 뭐든 어느 정도의 강박이 들어 있다. 그 강박은 종종 피곤하다. 그렇게까지는 바라진 않는다.


나는 적당한 정도를 원한다. 새것 특유의 광택이 빠져나간 대리석 타일 복도를 지나 리셉션 데스크에 선다. 직원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허둥대지도 않는 수준(이 정도가 정말 중요하다)으로 나를 안내한다. 그에게 열쇠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간다. 카펫이 적당히 바랜 복도를 지나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향기.


그 향기에도 적정선이 있다. 낡기만 하고 관리하지 않았다면 문을 열자마자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난다. 노골적인 곰팡이 냄새도 맡아 봤다. 청소가 모자라도 문제지만 과해도 문제다. 저렴한 섬유유연제를 리넨에 아낌없이 쏟아 붓는 호텔도 있다. 이런 호텔이라면 모텔 특실 느낌을 벗어나기 어렵다. 모텔 특실이 나쁜 건 아니지만 아무튼 편안해지는 향은 아니니까.


적당히 좋은 냄새가 나려면 먼저 청결해야 한다. 적어도 치명적으로 더러운 부분은 없어야 한다. 악취를 없애는 게 가향의 기본이다. 여기까지가 숙박업소의 기본적인 정성이라면 그 위에 어떤 향을 끼얹느냐는 균형과 감각이다. 그냥 깨끗하게 세탁하고 잘 헹구기만 해도 리넨에서는 좋은 냄새가 난다. 그 냄새를 맡으며 누워 있으면 피로든 울분이든, 나쁜 징조처럼 끓고 있던 뭔가가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호스피털리티의 냄새 하면 떠오르는 호텔이 몇 군데 있다. 잘 관리된 대도시 중가 호텔이다. 그랜드 워커힐 서울의 더글라스 하우스, 제주도 하와이 호텔, 홍콩의 YWCA 호텔 같은 곳들. 라인 강변 근처의 어떤 호텔은 빛바랜 정도는 완벽했는데 청소가 부실했다. 괌 바닷가의 어떤 호텔도 하드웨어는 좋았지만 청소가 엉망이었다. 해운대의 어떤 곳은 청소가 너무 과해 예의 그 특실 냄새가 났다.


사치품 구경을 직업 삼으며 값비싼 것보다 적당히 좋은 걸 찾기 더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게 호스피털리티의 향기는 기본과 정성과 균형과 감각을 뜻한다. 늘 귀중하지만 왠지 모르게 요즘따라 점점 찾기 힘들어지는 것들. 지난 겨울 나는 너무 지쳐 몇 번 혼자 호텔에 갔다. 호스피털리티의 냄새를 맡으면서 겨울잠처럼 깊은 잠을 잤다. 그때의 품질 좋은 잠이 요즘도 가끔 생각난다.



<얼루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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