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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의 키케로

당신이 정치인이 아니어도

by 박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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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 노트>는 로마 제국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형 키케로에게 동생 키케로가 건넨 조언을 정리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휴가용으로 추천하고 싶다. 로마의 선거와 내 휴가가 무슨 상관이냐 싶을 수도 있지만 내 쪽에도 이유는 있다. 내가 꼽은 장점은 네 가지다. 얇다. 재미있다. 내용이 깊다. 실생활에 대입할 수 있다.


우선 얇다. 58개의 짧은 제안이 전부다. 80페이지밖에 안 된다. 게이트 앞 카운터에서도 다 읽을 수 있다. 글이 짧으니까 어디까지 읽었나 보려 뒤척거릴 필요도 없다. 백팩 앞주머니 같은 곳에 대충 끼워 넣어도 되고 입국심사를 기다리면서 손에 말아 쥐고 있어도 된다. 여행지에 가져갈 책의 덕목으로 이 이상이 없다.


재미도 확실하다. 이 책의 재미는 건조하고 노골적인 상황 묘사에서 온다. 키케로는 훌륭하고 경쟁 후보는 엉망이며 로마는 '인간성의 시궁창'이다. 관찰력이 좋으면 묘사만 잘 해도 웃길 수 있다.


그런데 내용이 깊다. 키케로는 조언도 건조하다. 선의를 가지되 거짓말도 필요하면 해야 하고, 어떤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 사람에게 잘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 모든 설명과 조언의 목적은 하나로 압축된다. '더러운 판에서 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략. 통찰력이 좋으므로 내용이 깊을 수밖에.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실생활의 생존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나마 괜찮은 모습으로 살아남는 건 (아마)꽤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로마와도 같은 인간성의 시궁창에 몸을 기댄 채 살고 있다. 그때와 다를 바 없는 지금의 이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키케로 노트>는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풀장 옆에 누워 이런 책을 읽으며 보내는 휴가도 괜찮을 것 같다. 뭐니뭐니해도 얇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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