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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의 베스트앨범

by 박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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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가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쓴 소설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 월드의 창시자가 직접 만든 스스로의 해례본이며 그가 만들고 벌려서 열어둔 자루같은 세계를 스스로의 손으로 묶은 마지막 매듭이다. 이 소설의 한글판을 읽자마자 나는 막연하게 저런 메모를 해 뒀고, 책이 나온 지 수 년이 지난 후 다시 펴서 읽는 지금도 그 느낌이 변하지 않았다.


이 소설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창조했던 모든 세계관과 고민과 캐릭터와 기법이 나온다. 스스로 엮고 리마스터링한 베스트 앨범같다. 그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분량, 그가 가장 잘 구사하는 기교와 테크닉과 흐름,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주제가 이 책 한 권에 모두 들어 있다. 나는 이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 판 <스마일리의 사람들>같기도 했다. 그가 만들어낸 모든 캐릭터와 사건들이 지난 세기의 페이지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하루키 월드의 마지막 축하연을 열어주는 것이다.


소설가에게 어느 소설이 의미가 없겠냐마는 난 이 소설이 무라카미 하루키 씨 본인에게 의미가 무척 클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소설 안에 본인이 탐구한 것, 현실과 비현실, 와타나베 노보루부터 가노 쿠레타 자매와 다무라 카프카와 두 개의 달이 떠오르는 세계에 이르는 스스로의 모든 상징체계를 담았다. 이 긴 이름의 소설이 독자나 평론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늘 하던 이야기를 한번 더 한 거라는 혹평을 받을 지도 모르고, 그건 일정 부분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수준에 이르면 남들의 이런저런 반응이나 숫자로 돌아오는 현실세계의 보상보다 자기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 정도로 성공했다면 그렇지 않을까.


이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스타 소설가의 소설을 한 자도 읽지 않은 사람에게도 충분히 감동적인 소설이다. 개인이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 시스템 안에서 용케 잠깐이라도 완벽한 관계를 만든다는 것, 그 관계가 아주 처참하게 박살나더라도 우리가 우리였다는 사실이 주는 행복이 인간을 평생 버티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쌓아 올린다는 것, 어떤 완성은 다 만들고 난 후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 그러니 당연히 어렵더라도 당신 스스로의 삶을 장거리 달리기처럼 살아가라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는 독자에게 편안하게 그 주제를 흡수시키기 위해 아주 꼼꼼하게 하나의 짧은 장편소설을 썼다. 나는 앞으로도 이 소설을 계속 지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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