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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라 불리던 언젠가

지나면 다 추억이라더니

by 박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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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BBC 1은 2월21일부터 3월 27일까지 6부작 드라마 <나이트 매니저>를 방영했다. 군인 출신 호텔 야간 지배인이 어쩌다 보니 지하세계의 거물과 싸우려 그의 이중간첩이 된다는 첩보물이다. 톰 히들스턴과 휴 로리가 출연했으니 캐스팅에도 공을 들인 대작이었다. 드라마의 첫 방영일에 맞추어 원작자 존 르 카레의 리뷰가 <가디언> 주말판에 2면 전체 분량으로 실릴 정도였다.


존 르 카레는 이름부터 냉전의 산물이다. ‘르 카레’는 프랑스어로 사각형이라는 뜻, 이 이름은 한국어로 치면 기타지마 찬용 같은 노골적인 가명이다. 그는 전직 MI6 정보원이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퇴직한 후 스파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직장 이야기를 하려니 가명을 쓸 수밖에. 한국에서 ‘존 르 카레 깊은 맛’ 정도로 소비되는 이름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사실 그가 그만둔 진짜 이유는 적국에 정체가 노출되어서였다. 그렇게 된 사연이 신기하다. 영국의 명문대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고급 관료 5명이 자진해서 KGB의 2중 간첩이 되었다가 차례로 적발됐다. ‘케임브리지 파이브’라고 불렸던 이 사건은 당시 영국을 뒤흔들 정도로 유명했다. 이 사건으로 옷을 벗게 된 데이비드 콘웰은 존 르 카레로 이름을 바꾸고 냉전을 무대 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일을 쓴 것이 영화화되기도 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다.


20세기의 두 사회체제였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싸움과 작은 후희같은 몇 개의 전쟁을 남기고 훗날 냉전이라 불리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온갖 일들을 거쳐 이 시기도 끝나고 세계는 글로벌과 디지털 시대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얼추 냉전의 끝은 90년대 초반, 소련의 개혁개방 선언과 베를린 장벽 붕괴로 꼽힌다. 벌써 끝난 지 20년이 넘은 과거다. 냉전시대 첩보전의 산실 베를린에 ‘더티 쉬크’같은 별명이 붙을지 누가 알았을까 싶다. 역사라는 게 그렇다. 당시 등장인물의 공과를 매기는 게 끝나고 나면 후대 사람들은 순수하게 이야기로 과거를 소비하기 시작한다. 냉전이 이제 그 구간으로 들어가고 있다.


<가디언>은 1월 20일에 ‘냉전에 대한 책 10’을 소개했다. 책을 추천한 작가 프란체스카 케이는 냉전기를 ‘희미한 추억처럼 느껴진다. 명확한 시작과 끝도 없고, 행동은 은밀하고 규칙은 모호했던, 안개와 연기의 전쟁’이라고 썼다. 그러게 말이다. 그때에 비하면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이 데이터로 저장되는 21세기는 확실히 다른 세상이다.


프란체스카 케이가 꼽은 냉전의 책 10권 중 7권은 한국어판도 있다. 조지 오웰의 <1984>, 존 루이스 개디스의 <냉전(한국어판 제목은 냉전의 역사)>, 레이몬드 브릭스의 <바람이 불 때에>,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EL 닥터로의 <다니엘서>, 아서 밀러의 <시련>, 네빌 슈트의 <해변에서>. 이상과 광기를 냉전 아래에 감춰둔 시기의 독서 리스트다.





월간 남성지 <루엘>에 실렸던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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