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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Dec 31. 2017

우아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우거나 도망가야 한다

스위스 시계처럼





"살아남기 위해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셔츠 위에 재킷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오랜만에 손님을 맞은 시골 사람 같은 옷차림이었다. 스위스의 깊은 산 속에 있는 오메가 공장 안에서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옛날 스위스 사람들은 겨울엔 할 일이 없었어요. 치즈를 만들거나 시계의 부품을 깎았습니다. 어떤 집은 톱니바퀴를, 어떤 집은 바늘을. 그 모든 부품을 한 집에서 모아서 조립했어요. 그게 스위스 시계의 시작입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 스위스 시계는 엄청나게 성공했다. 가장 확실하면서도 황당한 증거는 이들의 새로운 공장이다. 요즘 스위스 고급 시계 업계는 유명 건축가에게 공장 건축을 맡긴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스위스의 베르나르 추미가, 브라이틀링은 알랭 포르타가 설계했다. 오메가는 2014년 프리츠커 상을 받은 반 시게루에게 공장 건축을 맡겼다. 살아남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주 우아한 비즈니스로 자리잡았다.


살아남는 것과 우아한 것, 만드는 것과 알리는 것, 보수적인 것과 대담한 것, 도망가는 것과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스위스 시계 업계는 스위스라는 특이한 나라가 만들어낸 아주 특이한 물건이다. 엄밀히 말해 기계식 시계 안에 들어 있는 기술은 기술적으로는 용도폐기되어도 크게 상관 없는 구식이다. 하지만 스위스인들은 이들만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전 세계의 시계 애호가를 여전히 끌어들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다던 오메가의 말은 허풍이 아니다. 초기의 스위스 시계공들은 난민이었다. 1550년 이후 종교 박해를 피해서 프랑스에서 온 신교도들이 초기 스위스 시계의 부흥을 이끌었다. 이들은 점차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살기 시작했다. 이태의 <남부군>같은 이야기다. 마침 세계는 시간 계측 기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제국의 경영에는 시계가 필수적이었다. 시계는 특히 바다에서 필요했다. 시간을 알아야 그에 입각해 지도를 읽어 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의 GPS처럼 중요한 기계였던 셈이다. 초기의 시계에 '마린 크로노미터'같은 말이 쓰여 있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값비싼 기술이 쓰이는 곳은 예나 지금이나 둘이다. 첨단산업, 그리고 최고급 사치품업. 제국의 남자들이 시계로 세계를 경영하는 동안 제국의 여자들은 시계라는 최신형 액세서리를 개발하고 있었다. 최초의 손목시계는 보석이 장식된 여성 시계였다. 1868년 파텍 필립이 헝가리의 코스코비츠 백작 부인에게 금으로 만든 손목시계를 팔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요즘의 눈으로 보면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때는 19세기였다. 남자는 손목시계를 찰 수조차 없었다. 대신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지금 우리가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계를 보는 것처럼.


남성용 손목시계가 보급된 계기는 슬프게도 전쟁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던 남자 엘리트가 대거 전사하면서 여성과 장애인의 인권이라는 새로운 권리가 태어났다. 이때 생겨난 어떤 신생 브랜드는 앞으로 사람들이 손목에 시계를 찬다면 방수 기능이 중요해질 거라는 사실을 예견했다. 그는 방수 손목 시계를 만든 후 물이 새지 않는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시계 케이스에 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시계의 성능을 보여주기 위해 도버 해협을 수영으로 건넌다는 어느 여자에게 자신의 시계를 채워서 헤엄치게 했다. 자연스럽게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마케팅 캠페인을 진행한 이 회사의 이름은 롤렉스였다.


1차 세계 대전은 남자가 시계를 손목에 찬다는 가능성을 찾아낸 시기이기도 했다. 손목시계는 군사작전에 필요했다. 예를 들어 보병부대가 똑같은 시간에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두가 서로의 시간을 동기화시켜야 했다. 동기화를 하려면 모두 시계를 차야 했다. 그 과정을 거쳐 '남자가 손목에 시계를 찬다'는 새로운 복식 규범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남성복의 실루엣과 디테일이 대부분 군복에서 온 것처럼 오늘날 남성용 손목시계의 여러 요소도 대부분 그때의 군용 시계에서 왔다.


두 번의 세계대전은 스위스 시계 업계에게는 초대형 호황이었다.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돈을 벌고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돈을 벌었던 것처럼 스위스는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온갖 곳에 시계를 신나게 팔아치웠다. 오메가는 영국군 시계의 약 50%를 납품했다. 브라이틀링 창립자의 증손자 윌리 브라이틀링은 신분을 숨기거나 목숨을 걸고 외교 행낭같은 곳에 숨겨서 연합군에게 시계를 팔기도 했다. IWC는 이때 영국 공군에게 시계를 납품했다는 과거를 아직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해 파일럿 시계 라인업 ‘마크’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이때의 호황 덕에 스위스는 1970년대 세계 시계시장의 약 50%를 차지했다.


운명은 묘한 것이다. 영국은 2차 세계 대전의 승리를 위해 나라의 재정을 쏟아부었다. 덕분에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산왕공고를 겨우 이긴 북산고처럼 경제적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시계 수출을 통해 연합군의 승리에 공헌했다고 볼 수 있는 스위스 역시 2차 세계대전의 또다른 추축국 일본에게 완전히 당했다. 쿼츠 파동 때문이었다. 세이코가 1969년 쿼츠 손목시계를 발표하고 시계업계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쿼츠는 더 정확하고 더 저렴했다. 시간 계측 성능에서 스위스의 기계식 시계는 도저히 일본의 쿼츠를 당할 수 없었다.


스위스 시계는 눈사태처럼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이때는 롤렉스도 쿼츠를 만들고 오메가는 디지털 시계를 만들었다. 역부족이었다. 1970년부터 1988년까지 스위스 시계 업계의 노동자는 90000명에서 28000명으로 줄었다. 1600개이던 브랜드 역시 700개로 줄어들었다. 기계의 시대가 끝나고 전기의 시대가 온다는 신호였다.


스위스인은 자기가 뭘 잘 하는지 너무 잘 안다. 일본은 스위스를 기술로 눌렀다. 하지만 스위스가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를 누를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이들은 1983년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었다. 이 브랜드를 만든 사람들 자체는 옛 시대의 영웅들이었다. 스위스 은행과 정부에 있던 기존 업계의 사람들이 새로운 시계 브랜드의 주인공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옛날에 잘 하던 걸 다 버렸다. 비싼 시계, 기계식 시계, 고가 사치품. 대신 이들은 그 이미지만 얇게 떠서 플라스틱 케이스와 고무 밴드로 만든 쿼츠 시계 위에 초밥처럼 올렸다. 거기에 '두 번째 시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스와치swatch의 탄생이었다.


이들이 전통을 버리고 원했던 건 하나뿐이었다. 옛 영광. 아직도 판매되는 스와치 첫 시계의 이름에 스위스인들의 간절함이 배어난다. 한번 더once again. 자신들이 잘 하던 걸 다 내려놓고 싸구려 시계나 판다는 건 사실 꽤 큰 도박이다. 하지만 스위스는 그 도박판에서 성공했다. 스와치는 출시 2년만에 250만개가 팔렸다.


"집 지하에 있는 방공호 가볼래?" 다섯 번째 바젤에 갔을 때 폴란드에 와서 바젤 근교에 살며 에어비앤비로 용돈을 버는 막심이 말했다. 소문대로 아파트 지하에 아주 두꺼운 철문이 있었다. 그는 관광 가이드처럼 말했다. "전쟁이 나면 스위스로 진입하는 모든 도로와 교량을 폭파시켜. 사람들은 지하에 있는 방공호로 들어가지. 거기서 계속 버티는 거야." 이 말을 끝내고 나온 바깥은 목장처럼 평화로웠다. 평화로울 때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스위스 스타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쿼츠 파동에서 벗어난 스위스 시계 업계가 정확히 이런 일을 했다. 그 중심에 니콜라스 조지 하이예크가 있었다. 그는 스와치를 수백만개 팔며 현금을 확보하자 죽거나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스위스 시계 브랜드를 살려내기 시작했다. 5만원대의 스와치부터 가장 싼 시계만도 2천만원에 가까운 브레게까지를 모아 강력한 수직계열 그룹사를 만들었다. 이게 스와치그룹이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 제조사다.


"스위스 시계 업계의 전통을 잇기 위해 치즈를 만듭니다."  올해 10월 제니스의 신제품 발표회를 위해 한국을 찾은 장 클로드 비버가 조선호텔에서 말했다. 이제 스위스인이 한층 여유를 찾았다는 증거이자 이들이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스위스 시계를 처음 만든 사람들은 농부였어요. 시계를 만들지 않을 때 그 농부들은 치즈를 만들었습니다. 내 치즈는 그때 그대로의 방식으로 만들어요. 기계도 전기도 쓰지 않아요. 나무와 모닥불로만 만듭니다. 이렇게 만든 치즈는 못 팝니다. 팔려고 가격을 매기면 너무 비싸져요. 물건이 너무 비싸지면 생길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둘 뿐입니다. 안 팔리거나, 안 만들거나. 나는 (만들되)안 팔기로 했습니다."


장 클로드 비버는 지금 스위스 시계 산업을 대표한다. 그는 비틀즈를 좋아하는 히피인 채로 로잔 대학교를 졸업하고 시계 업계에 투신하는 바람에 망해가는 스위스 시계 산업을 눈으로 지켜봤다. 그는 1735년 만들어졌다가 망해버린 블랑팡을 22000스위스프랑에 사서 '우리는 쿼츠 시계 절대 안 만든다'는 역발상으로 브랜드를 되살린 후 스와치그룹에 6000만 스위스프랑에 되팔았다. 스위스 시계의 특징적인 디자인 요소를 추출하고 극대화시킨 위블로를 만들어서 성공시킨 후 LVMH 그룹에 또 팔았다. 지금은 태그호이어의 대표 겸 LVMH 시계 부문 대표다.


그의 치즈와 달리 그가 이끄는 태그호이어 시계는 최첨단 시설에서 만들어진다. 반도체공장 수준의 집진시설과 최신형 CNC머신이 지금의 '메이드 인 스위스' 시계를 만든다. 태그호이어는 폭스바겐처럼 시계 제작에 모듈 개념을 도입하는 건 물론 지금은 구글과 함께 스마트워치까지 만들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록 조금 허탈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대체 좋은 시계를 왜 사야 하는 걸까? 우리는 시계를 왜 갖고 싶은 걸까?


"나는 우리가 감성을 창조한다고 믿습니다.” 올 여름 도쿄에서 만난 로저 드뷔 CEO 장 마크 폰트로이에게 답을 들었다. “우리는 로저 드뷔 시계와 함께 사랑과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사랑과 선물은 절대 없어지지 않아요. 사람은 위기가 와도, 비를 맞아도 사랑을 합니다." 바로 이거다. 모든 인간은 성공을 원한다. 성공한 인간 중 어떤 인간은 기념비를 원한다. 어떤 인간은 성공하지 않았다 해도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기념비를 원할 수도 있다. 뭐든 상관없다. 세상엔 비싼 기념비적 물건이 필요하다. 전 지구적으로 알려졌으면서도 크기가 작아서 휴대하기 쉬운 기념비가 필요하다. 그게 지금의 스위스 시계다.


" 내가 자란 마을에서는 14살에 대부가 시계를 선물하는 게 전통이었습니다." 아스날 FC 감독 아르센 벵거는 <레퀴프>와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주 정중한 전통이자, 네가 어른이 된다는 징표이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시계를 차고 있는 걸 보면서 어른이 된 나를 상상하곤 했습니다." 유럽은 시계를 통해 스스로의 문화를 이어간다. 시계는 문화를 잇는 팔찌 역할을 한다. 그 팔찌에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이 있을 뿐이다. 아르센 벵거의 마지막 말이야말로 남자가 시계를 갖고 싶어하는 이유가 될 것 같다. "내게 하나뿐인 보석이에요."





<오디너리> 에 실린 글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게시물로 이걸 남기고 싶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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