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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Feb 13. 2018

종이의 미래

이거라고 알겠습니까마는


종이의 미래가 궁금했던 근원적인 이유는 불안이었다. 오랫동안 동경해서 끝내 들어온 잡지업계는 막상 들어와 보니 뿌리부터 흔들리는 어금니 같았다. 수많은 잡지가 사라졌다. 그 중엔 내가 몸담았던 곳도 있었다. 업계가 축소된데다 일도 더 피곤하고 복잡해졌다. 자연스럽게 사람들도 업계를 떠났다.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미세한 불안이 저주파음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가 이러면 종이는?’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 광고와 제작비 절감이라는 똑 같은 이야기를 150번째쯤 말하던 어느 회의에서였던 것 같다. 사실 저널리즘 시장은 활로가 있다. 콘텐츠를 종이에 담아 팔아서 매출을 일으키는 시장에서 콘텐츠를 통해 발생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 B2B로 거래하는 시장으로 변하고 있다. 종이는 사정이 다르다. 콘텐츠는 플랫폼을 고를 수 있지만 경쟁력이 떨어진 플랫폼은 콘텐츠를 고를 수 없다. 읽을거리를 만드는 회사가 종이를 버리면 어쩌지? 내가 속한 잡지업계부터 종이와 멀어지고 있을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우리 같은 잡지사에서부터 종이를 덜 쓰면 앞으로의 종이는 어떻게 될까?


“저희 회사의 경우엔 5년 전과 비교했을 때 종이 발주량이 반쯤 줄었어요.”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표회사의 공정 총괄자가 말했다. “업계 사정이 안 좋기 때문이죠. 매체 수도 줄고 발행 부수도 줄고, 각 잡지의 페이지도 줄었어요. 저희 회사의 이야기만은 아닐 겁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거에요. 인쇄용지 시장은 정체 상태에요.”

인쇄용지는 신문용지와 인쇄용지로 나뉜다. 그 중 신문용지는 정말 어렵다. 제지연합회 통계의 신문용지 생산 추이는 멀리서 바라본 말라가는 강물같다.  2011년 신문용지 소비량은 860,991톤이었다가 4년 후인 2015년에는 602,550톤으로 줄었다. 올림픽 주기인 4년만에 1/3가까운 정도로 소비폭이 줄어든 것이다. 섬뜩할 만한 감소다. 인쇄용지도 감소폭이 다를 뿐 똑같이 어렵다. 2011년 인쇄용지 소비량은 2,179,833톤, 2015년 인쇄용지 소비량은 1,969,354톤이다. 


종이를 만들려면 물가의 큰 공장이 필요하다. 종이는 무겁고 부피가 크니까 옮길 때 돈도 많이 든다. 그래서 20세기까지의 제지산업은 국가마다 하나씩 있는 장치산업 성격을 띠었다. 장치산업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게 중요하다. 조금 남기더라도 많이 파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큰 제지회사인 한솔제지와 무림 P&P는 그 시절의 산물이다. 


하지만 인쇄용지를 둘러싼 지표는 이런 식의 전통적 사업모델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가격을 보면 더욱 그렇다. <파이낸셜뉴스>의 올해 4월 기사에 따르면 인쇄용지 가격은 2016년 1/4분기 기준 톤당 100만원 정도다. 2005년 가격이 톤당 90만원대 중후반이었다고 한다. 종이가격이 물가상승률을 한참 못 따라가며, 이는 즉 지금 업계 안에서 출혈경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건강한 업계라고 보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인쇄용지 시장의 성장세가 더딘 건 알고 있습니다. 계속 공급과잉 상태였어요.” 한솔 홍보부 정상범 과장이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종이업계에서 스스로의 시장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이 회사인 한솔제지는 이 필연적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산업용지의 비중을 높이고 있습니다.” 

인쇄물의 재료라는 종이의 역할은 종이라는 거대 상품군의 일부에 불과하다. 한솔은 종이의 종류를 크게 셋으로 나눈다. 인쇄용지, 산업용지, 그리고 특수지다. 산업용지는 포장용지나 골판지 등이 해당된다. 특수지는 말 그대로 특수한 용도에 이용되는 종이다. 한솔제지는 이미 인쇄용지라는 둥지를 떠나 특수지로 옮기고 있다. 한솔제지의 지금 목표는 감열지 분야 세계 1위다. 


감열지? 열에 감응해 인쇄하는 종이를 뜻한다. “버려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으면 온 주머니를 가득 채우는 영수증의 재료가 감열지다. 마트에서 상품 라벨을 뽑을 때도 감열지를 쓴다. 한솔은 이미 컨설팅 업체에게 용역을 맡겨 조금씩 감열지로 분야를 틀고 있었다. 서천에 있는 장항공장도 원래 인쇄공장이었다가 감열지 교차생산이 가능하도록 설비를 개조했다. 그게 2012년이니까 급조한 계획이 아니었던 셈이다. 한솔은 거기 더해 2013년부터 샤데스와 텔롤과 R+S를 인수했다. 모두 유럽의 감열지 유통 회사다. <조선일보>보도에 따르면 한솔은 신탄진공사 생산설비장치가 다 만들어지면 세계 1위의 감열지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 한솔이 가는 길이 맞는지 아닌지는 나중에 봐야 알겠지만 지금과 다른 걸 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울러 한솔에서 눈여겨봐야 할 건 한국 제지업계에서는 처음으로 만든 종이 관련 R&D 센터다. 대전공장 안의 연구소에서 30여 명의 연구 인력이 제지 관련 기술을 연구한다. 종이산업이 장치산업에서 원천기술산업으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다. 한솔제지 이상훈 대표도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제지 산업도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첨단소재산업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2020년쯤이면 회사 이름을 ‘한솔제지’에서 ‘한솔소재’로 바꾸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지도 모른다.”


세계의 라이벌은 이미 훨씬 멀리 갔다. 세계 최고의 종이 선진국 중 하나인 일본에선 종이로 별걸 다 만든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016년 8월에 일본제지가 셀룰로스나노섬유(CNF)를 개발했다는 뉴스를 냈다. 카본 파이버(탄소섬유)의 원료를 나무에서 뽑아낸다는 개념이다. 카본 파이버에 비해 제조단가가 1/6이고 식품, 화장품, 자동차 등 다양한 분야에서 쓰일 수 있다고 한다. 


활자정보 플랫폼이라 할 수 있었던 인쇄용지 시장이 무너지는 지금 시장의 강자들은 이미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다행히 우리의 한솔제지도 부랴부랴 따라나서는 듯 보인다. 한솔은 변압기나 모터에 쓰는 절연용지 ‘아라미드 페이퍼’도 개발했다. 보통 인쇄용지보다 50배 비쌀 정도로 부가가치가 높다. 


기존의 방식으로 한계에 다다른 회사는 두 가지 길에 놓인다. 하던 대로 하다가 적당히 문을 닫거나, 아니면 존립의 명운을 걸고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거나. 필름업계는 종이의 좋은 반면교사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코닥은 망했고 후지는 살아남았다. 후지는 시장을 살핀 후 목표를 바꿨다. 코닥을 이기는 게 아니라 필름에서 벗어나는 걸로. 필름개발의 R&D 인력을 충원한 후 신기술을 이용한 신사업을 찾아나섰다. 덕분에 필름의 재료인 콜라겐을 다루는 기술을 화장품에 적용하는 등의 시도를 계속했다. 지금 후지필름은 아그파와 코닥으로 삼분되던 필름회사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2013년 후지필름 매출에서 카메라와 필름 매출비중은 13%정도, 사업분야 규모에서도 3위로 내려앉았다. 그 대신 후지필름은 마니악한 디자인과 후지 특유의 색감을 디지털에서도 그대로 재현한 카메라를 계속 만들고 있다. 종이라고 이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특수지 분야 역시 성장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평가된다. 대표적인 특수지로 꼽히는 곳은 포장지다. 이쪽 역시 종이라기보다는 상자의 재료 중 하나로 봐야 한다. 이쪽도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전환되는 건 맞되 첨단소재산업과는 다른 양상으로 가고 있다. 산업용지가 기술로 부가가치를 키운다면 특수지는 사치품의 방법론으로 부가가치를 키운다.


“인쇄용지업계의 침체는 시장에 이미 다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대신 포장용지나 산업지, 식품용지, 위생용지 등 새로운 분야의 종이는 성장 가능성이 나쁘지 않아요.” 두성종이 홍보팀 백은정 팀장의 말이다. 두성종이는 세계의 고급 특수지를 한국에 수입하는 회사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고급 종이 시장에 진출해 지금은 3천 종 이상의 수입 종이를 취급한다. 독일이나 일본의 색지 회사에서 선편에 종이를 수입한다. 이들에게 종이는 대체 불가능한 고급 염료 기술로 만든 선진국형 상품이다. 여기서도 기술이 중요하지만 이쪽의 기술은 고급 공예품에 더 가깝다.


“한국에서는 이런 색지를 못 만드냐고요? 종이를 만드는 기계를 초지기라고 하는데, 저희의 수입 업체 중 하나인 독일의 색지 회사에서는 초지기가 굉장히 느리게 움직인대요. 초지기의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펄프에 더 깊은 색을 입히는 노하우가 쌓여 있다고 합니다. 저희의 대표 상품인 ‘NT 랏샤’는 일본의 대표 색지에요. 코튼 펄프가 들어 있어서 만졌을 때 느낌이 좋고, 채도에 따라서 회색 라인업이 아주 많이 있는 게 특징입니다.” 


두성종이에게 종이 시장은 광고인쇄시장과 패키지 시장으로 분류된다. 들여오는 종이가 비싼 만큼 아무래도 사진집이나 고급 팸플릿 등 고급 시장이 많다. 실제로 이들이 취급하는 인쇄용지 중에는 놀라울 정도로 흑색의 계조를 잘 표현하는 ‘에어로즈’ 같은 인쇄용지도 있다. 대형 장치산업으로의 종이와는 다른 만큼 성장세도 남다르다. 두성종이의 매출은 종이가 사양산업이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만든다. 두성종이 2014/2015 CSR 리포트에 따르면 두성종이의 영업이익과 영업이익률은 2013년부터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두성종이는 2015년 13.86%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종이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 인쇄매체로의 종이의 시대가 끝나고 있을 뿐이다. 인쇄매체로의 종이도 사실은 끝나지 않았다. 양적으로 팽창하지 않을 뿐이다. 종이 기반 아트북 페스티벌인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열리면 1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주말 내내 일민미술관이 있는 광화문역에 온다. 올해도 1만 6천 명의 젊은이들이 현장을 찾았다. 언리미티드에디션을 총괄하는 유어마인드 이로 대표의 말을 귀담아 들을 만하다. “종이 책이라는 ‘매력적 입체’는 사람들을 계속 끌어당길 거에요. 스마트폰 등의 디바이스도 종이 책의 라이벌이 아니에요. 오히려 종이 아트북을 파는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트위터 등의 SNS를 통해 전파돼요. 기존의 업계에 비하면 우리는 아주 작은 시장이지만, 여기서 조금 더 성장할 여지는 있다고 봐요.”


이 원고를 쓰는 틈틈이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가 쓴 <종이의 역사>라는 책을 읽었다. “전자책의 인기, 뉴스 판매 부수 감소, 치솟는 에너지 비용, 섬유 재생 증가, 노화된 장비, 외국 경쟁, 불확실한 세계시장, 환경에 대한 관심 고조, 전자 기록 보관으로의 변화”. 1998년 미국의 제지사 P. H. 글랫펠터가 직면한 시장의 현주소였다. 하지만 2010년에 저자와 만난 조지 글랫팰터는 훌륭한 통찰력과 용기로 변한 시장에서 살아남는다. 그가 밝힌 비결이 종이의 미래에 대한 단초가 될 수 있겠다. “첫째, 더 이상 가치 창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전부 바꾸는 것. 둘째. 우리 가치를 창조해낸다는 기업의 핵심 가치는 굳건히 지키자는 것.” 


낙양지가(洛陽紙價)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진나라의 좌사가 쓴 삼도부가 워낙 명문이라 그걸 베끼기 위해 낙양 사람들이 너도나도 종이를 사서 종이값이 올랐다는 이야기다. 낙양지가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지만 종이는 아직도 가치 있는 소재이자 훌륭한 인쇄물의 재료다. 기술적으로 발전하는 중이다. 고급 소재로의 성격도 강화된다. 여전히 종이를 좋아하는 젊은 사람이 있다. 그들이 종이의 가치를 계속 새롭게 찾아낸다. 낙양의 지가는 아직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에스콰이어> 2017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벌써 작년 이야기네요. 이미지 링크는 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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