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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Aug 11. 2015

좋은 호텔

좋은 호텔을 고르는 것과 나쁜 호텔을 피하는 것



제가 처음 취재한 숙박업소는 호텔이 아니라 객잔이었습니다. 그 <신용문객잔>같은 무협 영화에 나오는 객잔. 그곳은 중국 남서부 쿤밍 성 리장의 후타오샤라는 고산 협곡 지대에 있었습니다. 말린 옥수수처럼 치아가 노랗던 분이 끌어주는 조랑말을 타고 그 객잔에 도착했습니다. 옆 방에는 마리화나에 취한 것 같은 프랑스 미남이 양말만 신고 해발 2,600m까지 올라와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을 비롯해 그 객잔의 모든 투숙객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의 저는 술을 마다하기엔 너무 사회 경험이 없었습니다. 믿기 힘들었지만 그 객잔에서는 백숙을 삶고 김치도 줬습니다. 비자발적으로 취한 채 중국의 협곡에서 닭 백숙과 공장제 김치를 먹고 있는데 밤하늘엔 거짓말처럼 별이 많았습니다. '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많은 호텔을 볼 줄은 몰랐습니다.


2009년 말부터 2011년 초까지 지금은 없어진 <Off>라는 여행잡지에서 일했습니다. 10개국의 11개 도시를 취재하는 동안 본 호텔 방이 100개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그 다음 직장에서도 이런저런 출장을 가며 호텔에 묵었으니 안에 들어가서 냉장고를 열어 보거나 이불을 덮어 본 방이 세 자리 수는 될  듯합니다. 벽지를 핥거나 카펫의 냄새를 맡는 정도의 노력까지는 하지 않았어도 개인적인 기준이 생기긴 했습니다.


구질구질한 바깥 세상을 지우는 것. 개인적으로 결론 지은 고급 호텔의 본질입니다. 도심의 고급 호텔은 큰 도시의 혼잡한 중심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끄러운 도심에서 고급 호텔의 정문으로 들어가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순간 남는 건 호텔 엘리베이터 음악 특유의 나른한  선율뿐입니다. 그 선율을 따라 객실로 들어가면 희미한 공조기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구질구질한 바깥 세상은  소리뿐 아니라 온도와 습도이기도 합니다. 21세기 최고급 호텔의 온도와 습도는 늘 일정하며, 손님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곳이 8월의 홍콩이든 2월의 모스크바든, 고급 호텔의 객실은 늘 가운만 입고 있어도 될 정도로 안락합니다. 그것도 입기 싫다면 뭐, 온도를 더 올리면 됩니다.


고급 호텔의 기준으로 제가 떠올린 요소는 1) 입지 2) 방의 넓이 3) 서비스 4) 방 밖 시설의 양과 질 5) 방 안의 디테일입니다. 이 요소를 모두 만족시킨다면 누구나 인정할 만한 고급 숙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각 요소를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입지는 무슨 숙박업소든 기본입니다. 입지의 요소는 도심과의 거리일 수도 있고 전망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봐도 좋다 싶을수록 가격이 올라갑니다.

예를 들면 홍콩의 고급 호텔은 절묘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창문만 열면 바닷바람이 들어올 만큼 바다에 바짝 붙어 있거나, 미드 레벨 쪽에 자리잡아서 시내 곳곳에 간편하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홍콩 시내 특유의 혼잡함과는 거리를 두는 식입니다. 태즈매니아의 와이너리에서 만든 그림 같은 숙소도, 개인용 해변이 딸린 몰디브의 워터 빌라같은 것도 입지에 포함됩니다.


둘째, 방의 넓이도 고급 호텔을 이루는 요소입니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일수록 객실 면적은 그 자체로 호텔의 급수입니다. 다른 지역이라도 일부 예외를 빼면 비싼 방은 넓습니다.

최근 일 때문에 묵었던 도쿄의 한 특급 호텔은 전에 갔던 일본의 다른 호텔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었습니다. 세면대 두 개와 욕조가 달린 화장실 건너편에는 보통 일본 비즈니스호텔의 객실 면적 정도는 되어 보일 옷방이 있었습니다. 침실은 화장실과 옷방을 합친 것보다 더 컸습니다. 그 방도 스위트룸이 아니었으니까 스위트룸은 더 넓겠죠. 미국처럼 객실 면적에 너그러운 나라는 스위트룸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큰 곳도 많습니다.



셋째, 서비스는 손님 한 명에 배치되는 직원의 수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최고급 리조트는 손님 한 명에 직원 두 명 정도의 비율을 가진 곳도 있습니다.

손님 한 명에 직원 두 명 정도의 비율을 가졌던 곳에서는 실제로 하룻밤 묵어 보기도 했습니다.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몰디브의 최고급 리조트였습니다. 어디 문을 열고 나갔다 오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도쿄의 어느 호텔에서는 안경 케이스를 두고 외출을 다녀 오자 안경 케이스 옆에 안경 닦는 천이 놓여 있는 걸 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서비스에도 나쁜 서비스에도 무심한 편입니다만 이정도 서비스엔 흠칫하게 됩니다.


넷째, 방 바깥 시설의 양과 질도 좋은 호텔을 이루는 요소입니다. 이것도 방대하고 모호합니다. 레스토랑 요리사의 이름값과 조깅 코스의 질, 풀장 샤워장의 샤워기 브랜드, 비즈니스 라운지에 가져다 둔 신문과 잡지의 종류 같은 것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우리가 이름을 아는 고급 브랜드 호텔은 거의 다 저 조건을 충족시킵니다.

조깅 코스의 질은 정말 훌륭한 호텔과 그렇지 않은 호텔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고급 호텔의 장거리 조깅 코스는 달려보지 않고 만든 것 같았습니다. 지도상으로 보기엔 좋지만 살풍경한 시골 풍경과 비린내가 계속 이어져서 걷다 말고 돌아왔습니다. 반면 달리기에 취미가 없더라도 한두 시간쯤 걸어 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조깅 코스를 짜둔 호텔도 많습니다. 고급스럽다는 모호한 느낌을 구체화시키는 건 아주 작고 사소한 요소입니다. 비상업적인데다 유지하려면 노력도 많이 해야 하는 시설이 있다는 사실 역시 그곳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정도로)고급스러운 호텔이라는 뜻입니다. 라스베가스의 최고급 호텔 1층에는 갤러리가 있습니다. 발리와 몰디브에도 최고급 리조트에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라스베가스의 호텔 갤러리를 누가 가나, 발리에서 누가 책을 읽나 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미 고급스러운 걸 만들 자격이 안 되는 걸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방 안의 디테일은 고급 호텔의 결정적인 캐릭터를 만듭니다. 여기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쓸수록 세속적 기준의 고급 호텔입니다.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차는? 냉장고에 들어 있는 술의 가짓수와 샴페인 브랜드는? 옵션으로 고를 수 있는 베개의 종류는? 이런 식의 자잘한 요소가 호사스러울수록 좋은 호텔에 가까워집니다. 고급 브랜드 호텔일수록 이쪽 요소에 신경을 씁니다.

베트남에 있던 어느 리조트는 고를 수 있는 베개 종류만 10가지에 이불 종류도 4개나 되었습니다. 이불과 베개를 고를 수 있는 호텔은 몇 개 되지만 저 정도로 옵션이 많은 호텔은 찾기 쉽지 않습니다. 좋은 호텔일수록 미니바에 들어 있는 술의 종류도 늘어납니다. 냉장고 안에 최고급 샴페인이 들어 있다면 최고급 호텔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휴양지의 고급 리조트에는 배스 솔트를 기본으로 주는 고급 리조트도 있습니다. 고급스러움을 이루는 자잘한 디테일은 굉장히 많습니다. 서랍 속에 오로지 볼펜을 놓아두기 위해 전용 홈을 파둔 호텔도 있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꼽는 좋은 호텔의 작은 기준 중 하나는 자체적으로 만든 편지지의 품질입니다. 양식을 아는 호텔이라면 21세기라도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구비해 두고, 제대로 된 호텔이라면 자신의 로고와 주소를 새긴 전용 편지지와 편지봉투 세트를 만들어 둡니다. 좋은 호텔의 경우엔 편지지의 지질이 무척 좋습니다. 만년필의 잉크도 미끄러뜨리지 않고 흡수시킬 것처럼 두툼하고 광택 좋은 종이 위에 자사의 로고를 새긴 것. 제게는 이 편지지가 고급 호텔의 상징입니다.



저 기준에 따르면 좋은 호텔을 고르는 법은 간단합니다. 좋은 도시의 좋은 동네에 있는 고급 브랜드 호텔을 고르면 됩니다. 다만 모든 요소가 뛰어난 호텔은 투숙료가 조금 비쌉니다. 조금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세계적인 규모의 대도시에 있는 최고급 호텔의 1박 투숙료는 2015년 8월 현재 한화로 얼추 80만 원 정도면 예약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비싸죠. 여러분의 휴가 예산이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제게는 굉장히 큰 액수입니다.


저를 포함해 적지 않은 분이 한정된 예산 안에서 최대한 좋은 걸 고르고  싶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경우에도 아까 정해둔 기준이 도움이 됩니다. 1부터 5까지의 각 요소 점수가 낮아질수록 객실 요금은 내려갑니다. 예를 들어 위치는 냄새나는 뒷골목이고 방 넓이는 트리플 베드만 하고 방 안의 티백은 15년 전에 갖다 둔 것 같고 하우스키퍼는 있긴 한 건지 싶고 부대시설이 하나도 없는 호텔은 당연히 최고급 호텔보다 저렴합니다. 방금은 극단적인 예지만, 고급품의 요소를 생각한 후 나의 상황과 취향에 맞춰 불필요한 요소를 소거하는 방식은 물건을 살 때 도움이 됩니다. 20세기 제품의 필수요소를 제거해서 요금을 줄인 후 생색을 내는 건 21세기의 저가항공사와 SPA 브랜드가 신나게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호텔 투숙료에 적용될 변수는 성수기와 유행입니다. 호텔과 여행상품에는 계절성이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계절상품은 비수기에 가격이 내려갑니다. 도시도 생선처럼 제철이 있습니다. 라스베이거스는 늦가을과 초겨울이 저렴하고 발리는 우기인 2월 전후에 가격이 낮습니다. 여행은 감성적인 상품이라 유행도 잘 탑니다. 유행이 지난 장소나 호텔은 시설에 비해 가격이 낮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유행 지난 곳의 비수기 호텔이(라도)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예산 규모보다 더 나은 시설을 가진 호텔에 머무르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호텔의 가격 앞에서 자주 혼란을 느낍니다. 호텔이라는 상품은 물건이 아니라 점유 시간이기 때문에 정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인터넷 사이트의 할인폭은 매번 너무 큽니다. 이 혼란 앞에서 원칙은 하나뿐입니다. 싸고 좋은 물건은 없다는 것. 물건의 가격은 거의 정직합니다. 그 가격을 매기는 것이 일인 사람도 있겠죠. 우리처럼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적절한 마진 폭과 사람들이 긴가민가 하면서도 결국은 사도록 하는 숫자를 만들어내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잘 샀다고 생각한 구입 역시 가격 전략가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밑지는 장사는 별로 없고, 밑지고 파는 물건이 좋은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호텔을 잘 고르는 것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적당한 호텔을 고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요즘 같으면 가격을 모아둔 홈페이지 몇 군데를 보고  그중 가장 내 상황에 적절한 것(기존 포인트가 있다, 무이자 할부가 된다 등)을 골라서 빨리 결제하고 나오는 게 당신에게 가장 유리합니다. 시중의 인터넷 사이트는 소비자의 노력과 시간과 고민을 모아서 데이터로 만듭니다. 데이터화에 들어간 비용은 언젠가 고스란히 당신에게 돌아갑니다.


다만 나쁜 호텔을 피하는 방법은 있을 수 있습니다. 호텔이 제공하는 정보의 이면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광고를 너무 많이 하거나 너무 안 하는 호텔,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것 같은 사람들이 혹평하는 호텔, 방 넓이를 속이려  광각 렌즈로 사진을 찍어서 사진의 양쪽 가장자리가 엉망인 호텔은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건 개인적인 호불호일 수도 있지만 큰 역 앞에 있는 동네도 웬만하면 피하는 편입니다. 어느 도시든 큰 역 앞은 지도상의 입지만 매력적이고 실제 분위기나 치안이 별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큰 역 앞에 있는 낮은 등급의 호텔은 가지 않고 남에게 권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제가 좋아하는 호텔의 기준은 값이나 시설이 아니라 거기서만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느냐입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가격이 올라가면 최고급 호텔 사이의 비교는 큰 의미가 없어집니다. 리장의 객잔은 유일한 분위기가 있다는 점에서 훌륭했습니다. 부산 구도심의 언덕 위에 있는 기와 지붕 호텔도 유일한 캐릭터가 있다는 점에서 무척 좋아합니다. LA 근교에 있던 바다 근처의 별 세  개짜리 호텔도 그야말로 미 서부 느낌이 나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고급품과 좋은 물건은 다르고, 좋은 물건은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며, 내가 좋아하는 데 꼭 남의 이해를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호텔도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좋은 호텔을 고르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번에는 여행지에 챙겨가면 좋을 책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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