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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Oct 27. 2020

최지만, 혹은 먼 곳을 바라보는 것


한국인 타자 최초로 월드시리즈에 출전해 안타를 친 야구선수 최지만을 4년 전 이맘때쯤 만났다.


그때 나는 <에스콰이어> 에디터였다. 인터뷰 건으로 매니저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당시 최지만은 LA 에인절스에서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트리플 A를 오가던 선수였다. 흔히 AAAA라고 하는, 트리플A에서는 강하지만 메이저리그 주전이 되기엔 애매한 수준이었다. 그 정도인 만큼, 냉정히 말해 일간지 인터뷰까지는 가능하지 않으니 남성 월간지 에디터였던 나에게까지 연락이 왔을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최 선수에게 흥미가 있었다. 초고교급 선수라도 미국에 바로 가는 야구선수는 많지 않다. 성공 예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 박찬호나 추신수는 정말 예외 중의 예외다. 이제 한국 야구선수의 미국 진출이라는 데이터가 쌓였는데도 미국에 바로 가서 승부를 본다는 발상이 궁금했다. 실력에 자신이 있었을까? 아니면 생각이 없는 사람일까?


최지만 선수는 카니발을 타고 대치동 스튜디오로 직접 왔다. 촬영용으로 준비했달라고 부탁했던 배트와 유니폼도 잘 챙겨왔다. 인터뷰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는 내내 프로의 친절함을 보였다. ‘그 사람 좋은 사람이었다’ 같은 미담을 전하려는 게 아니다. 유명인 인터뷰를 한 번만 하고 내가 그 사람이 좋은지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인터뷰와 촬영 자리에서 프로페셔널답게 친절했는가, 묻는 말에 대답을 다 해주는가, 그뿐이다.


최지만은 그 면에서 훌륭했다. 말에 앞뒤가 맞았고 묻는 말에 최대한 성의 있게 대답했다.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도 이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인터뷰 원고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예민한 사실도 물어보았다. 최지만은 금지약물 복용으로 출전이 정지된 적이 있다. 그때 이야기를 조심조심 물었는데 그에 대해서도 최지만은 열심히 이야기했다. 모르고 (한약이었나 영양제였나) 먹었다가 도핑에서 걸렸다고. 약물복용을 하는 선수들의 레퍼토리이기 때문에 그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본인도 그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그냥 질문이 왔으니 대답을 하고, 본인은 앞으로의 내일을 살겠다는 느낌이었다. 담담하게 열심히 대답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슬슬 다른 운동선수들과 인터뷰를 하며 최지만같은 운동선수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이름을 알 만한 운동선수들은 그 세계의 신같은 사람들이다. 기세와 도도함이 보통이 아니다. 월간지 에디터의 신분으로는 만나기도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어느 유명 축구선수는 팀을 통해 몇 번 연락했는데 ‘인터뷰 40개가 밀려 있다’는 말로 거절했다. 그 선수의 인터뷰는 그 후로 4개도 나오지 않았다). 어렵게 인터뷰를 한다 해도 최지만처럼 자기 생각을 확실한 구문으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최지만 선수는 내가 운동선수가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답을 했다. 최 선수는 보통 한국 사람/한국 야구 선수와는 다른 게 있었다. 그는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운동은 머리로 하는 거라고, 자기는 이유가 없으면 못 한다고 말했다. 2010년 미국에 올 때 한국 선수 7명이 왔고 그때 본인이 받은 돈은 7명 중 6번째로 낮았는데 지금은 자기랑 다른 한 명만 남았다고. 그런 말들을 신나게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냉정했다.


인터뷰를 했을 때 최 선수는 LA에인절스의 메이저리그와 트리플A를 오가고 있었다. 기사가 나가고 몇 달 후 뉴욕 양키스로 이적, 그 해에도 한국으로 돌아와 <에스콰이어>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 해에는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했다. 최 선수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해의 성적이 애매해서 편집장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 해 나는 <에스콰이어>를 그만뒀고, 최 선수는 그 다음 해 밀워키 브루어스로, 거기서 4개월만에 템파베이 레이스로 이적했다. 늘 응원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언제 한국에 돌아와도 놀랍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만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최 선수를 만나고 몇 년 후 나는 어느 항구도시의 헌책방에 있었다. 배를 타기 전 바다 위에서 읽을 책을 고르던 중이었다. 쌓여 있는 책 사이에 무라카미 류의 <368야드 파 4 제 2타>가 보였다. 무라카미 류는 1990년대를 강타한 후 거짓말처럼 한국 독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류를 좋아하고, 신해철의 죽음과 무라카미 류의 잊혀짐 사이에는 비슷한 상징성이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이 책을 냉큼 샀다.


혹시 읽으실 분을 위해 줄거리는 말하지 않겠지만 이 책에는 1990년대 일본/지금의 아시아가 맞이한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무라카미 류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일본에 있는 게, 상품을 철두철미하게 고안해 만들어내는 쾌락이 아니라 더 나은 복제품을 생산하는 품질 관리기술과 거품 경제뿐’이라고 단언한다. 책이 나온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크게 틀리지 않은 이야기다.


책에는 주요 등장 인물이 두 명 있다. 화자이자 주인공은 거품 경제의 파도를 타고 화려하게 살며 돈을 엄청나게 벌고 쓰는데 마음 한편에는 이 모든 화려함이 별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 주인공에게 한 번씩 편지를 보내는 어린 시절 같은 동네 동생이 있다. 그 동생은 축구를 계속하고 싶어 브라질과 스페인으로 가 축구 선수가 되었다가 골프 선수로 전향한다. 주인공은 그 아이를 두고 ‘늘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어느 날 주인공이 아이에게 묻는다. 넌 늘 어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아이가 대답한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긴 시시해요.”


시시한 세계를 떠나 넓은 세계에서 승부하는 아이와, 시시한 세계의 꼭대기에 오르고 뭔가 아주 중요한 것 하나만을 못 가진 남자의 이야기는 이 이후에도 잘 흘러간다. 궁금하시다면 어렵지 않게 헌책방에서 구할 수 있지만 요즘 눈으로는 비판받을 구석이 많아서 굳이 권할 생각은 없다.


올해의 최지만을 보며 류의 이 소설이 생각났다. 단기 계약과 계약 해지를 반복하며 메이저리그에 겨우 남아 있던 선수가 올해 한국인이 별로 없는 도시 야구팀의 플래툰 멤버가 되어 그 팀이 리그 1위를 하고 개릿 콜에게 거짓말처럼 홈런을 치고 한국인 최초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타자가 됐다. 다리를 찢는 절정의 1루 수비로 포토제닉한 순간을 만들고, 안타를 치거나 중요한 순간에 볼넷을 얻어 역전 득점에 성공하며 역대 최고의 강팀으로 평가받는 LA다저스를 누르는 데 일조했다. 한국 최고의 타자들인 김현수도 황재균도 버티지 못한 메이저리그에서,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강정호와 추신수도 가지 못한 월드시리즈에 간 최초의 한국인 타자가 최지만이다.


지난 시대의 최대 덕목이 (그게 뭐든)이념적 이상이었다면 지금 시대의 최대 덕목은 개인의 리스크 분산이다. 세계 곳곳의 천재와 몽상가들이 몇 세기에 이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고, 우리는 어느 정도 그들이 만든 세계를 즐기고 있다. 평균수명은 늘었는데 삶의 목표는 옅어졌다.  삶의 심지를 잊은 많은 사람들이 말꼬투리를 잡고 싸우는 일 정도에 재미를 느끼며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한다.


그런 중에도 뭔가 높은 곳, 저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이를테면 최지만같은 사람들이. 최지만의 표정을 자세히 보면 웃으면서도 웃지 않고, 웃지 않으면서도 웃는 듯한 표정이다. 뭔가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 뭔가 대단한 걸 본 적이 있는 자의 표정.


류의 소설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엄청난 규모의 일을 처리하는 인간들은 뜻밖에도 자기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동안이 많다. 그건 그들이 아이들이나 할 법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어린 시절은 지났어도 거품방울과 함께, 거품방울을 최우선 순위로 삼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거품방울이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그건 능력의 한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를 내걸고, 자신의 능력을 최고 한도까지 힘껏 끌어올리고서야 비로소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르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최지만이 올해 월드시리즈에서 그 무언가를 손에 넣을지, 앞으로 그 무언가를 손에 넣는 선수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최지만이 그 정도의 목표는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멋질 거라고도 생각하고.


“내 목표는 메이저리그에 가는 게 아니었어요.” 며칠 전 MLB닷컴에 나온 기사에서 최지만이 말했다. “내 목표는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선수가 되는 거였어요. 미국에 갈 기회가 왔고, 나는 이 기회가 또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아서, 젊은 나이에 (기회를)잡았죠.” 어린 나이부터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선수가 된다가 목표라. 나는 이런 사람이 잘 되는 게 좋다.


나는 최지만 선수를 두고 ‘같은 한국 사람이니까 힘내세요’ 같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내 눈에 최지만의 이야기는 자신의 몸과 자신의 조건과 자신의 집단에 씌워진 굴레를 뛰어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한계 밖으로 나가 보려는 인간의 문제로 보인다. 최 선수가 곧 열릴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길 바란다.



사진은 MLB 트위터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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