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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Nov 08. 2020

내키지 않는 변명

"어이 변명하지 말라구" 같은 느낌의 그림이라 올려 본다. 


이 연재물은 원래 매주 화요일에 올리기로 했다. 6주 동안은 그 방침처럼 매주 화요일에 올리고 있었다. 일곱 번째 게시물을 적고 있는 지금은 일요일로 넘어간 토요일 밤. 며칠 늦어버렸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긴 한데 세상에 사정 없는 사정이 어디 있나. 당당하게 양해를 구할 만한 사정은 아니었다. 


이 시리즈의 1회차 게시물 평균 분량은 3000자 내외다. 하루에 400자씩, 한 문단을 200자로 놓고 두 문단만 적어도 일주일에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다. 나 역시 유명 저자는 아니어도 원고 생산을 직업의 일부로 하고 있으니 400자쯤 만드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기도 하다(잘 적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스스로 시작한 일에 구멍을 냈다는 사실 때문에 내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게시물이 올라가야 했을 화요일부터 지금까지. 


기왕 늦은 거 기분이 안 좋아도 어쩔 수 없다. 다시 늦고 싶지 않으니 이참에 늦은 이유를 자세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원고가 늦은 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 예를 들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서 예상치 못한 변동이 생기는 것. 이건 지진이나 소나기같은 거라 내 예측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미리 고칠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내 집중력. 


나는 집중을 잘 못 하는 편이다. 집중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체력이 떨어져 있을 때도 있고 잡생각에 휘말려 그 잡생각이 나를 집어 삼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괜히 SNS나 뉴스 등에 올라와 있는 의미 없는 소식들에 휘둘려 집중력이 더 닳고 만다. 


내게 집중력이 소모되었다는 증거는 SNS를 보는 시간이다. 얼마 전 특정 SNS 앱을 몇 분 이상 틀었을 때 알람이 가게 해 두었다. 일과 관련이 되어 SNS를 오래 하는 날은 어쩔 수 없어도 네이트판 최신 사연 캡처 게시물같은 걸 보며 시간을 흘려버리는 날도 있다. 그러다 'ㅇㅇ앱을 0분 이상 사용하셨습니다'라는 알람이 오면 카지노에서 판돈을 다 잃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시간과 집중력을 다른 데 썼다면 더 나았을 텐데 싶고. 안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내게는 글을 적는 것도 어렵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글들을 잘 쓰시고 어쩜 그렇게 글쓰기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다. 나는 월간지 에디터로 일할 때도 글을 잘 쓴다거나, 글 잘 쓰는 걸로 유명하다거나 하는 편이 아니었다(이쪽 업계에는 글 잘 쓰시기로 유명한 에디터 분이 몇 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계셨다). 에디터를 하기 전에도 글 쓰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던 인간이 어쩌다 프로가 되었으니 일에 대한 내 감정은 상관없다. 이제 나에게 글은 무조건 잘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도 이런저런 노력을 했고, 그러하니 다행히 용케 아직까지는 기명 원고도 적고 블로그 구독자도 모아 가며 살고 있는 거겠지. 늘 감사한 마음이다. 


원고 작성을 일로 보다 보니 스포츠 선수의 퍼포먼스를 내 일에 연관지어 볼 때가 있다. 내게는 내 일 역시 맨몸으로 하는 일이다. 맨몸으로 어딘가에 가서 뭔가를 보거나 들어서 느끼고, 다방면으로 모은 자료를 보고 뭔가를 분석하거나 판단해서, 그 생각을 눈에 쉽게 보이는 형태로 다듬는 게 에디터의 일이라 생각한다. 원고 작성은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론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이 원고라는 게 묘하게 잘 되는 날이나 안 되는 날이 따로 있다. 스포츠 중 야구 선수 중 투수들은 공이 잘 던져지는 날을 긁히는 날이라고 한다던데 원고 역시 긁히는 날이 있는 것 같다. 정신을 차려 보면 몇 장씩 원고가 되어 있는 날 같은 거랄까. 다만 훌륭한 프로라면 긁히는 날을 자기가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원고를 적어야 하는 날이라면 중요한 원고를 적을 수 있는 건강 상태를 만드는 것도 프로의 일의 일부가 아닌가 싶어진다. 


좋은 글을 만들려면 컨디션을 최고조로 잘 올려 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점점 몸으로 느낀다. 그 컨디션이란 일상적인 관절과 근육 관리고, 동시에 원고를 할 때 높은 집중력을 유지하는 정신력 관리다. 내가 이런저런 준비를 잘 하지 못하다 보니 11월 3일에 올렸어야 하는 게시물을 이제야 올리고 있는 셈이다. 반성과 재발 방지를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적어둔다. 


미국은 911 테러가 났을 때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확실히 분석해서 그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나도 앞으로의 게시물 게시 일정이 틀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했다. 첫째. 뭐가 됐든 자주 적어 둔다. 둘째.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대비해서 올릴 수 있는 원고들을 미리 쌓아 둔다. 


적을 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지금 서울에는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 무엇이 재미인지, 내가 느끼는 게 다른 사람에게도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재미가 무엇인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 재미있는 화제 역시 많다. 지난 주에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 살까 말까 하는 것들과 결국 산 것들. 읽은 책과 읽고 있는 책과 읽다 만 책들. 이런 것만 적어 둬도 몇 달치 연재분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잘 쓰느냐의 문제지. 나는 내 삶이 늘 한심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한심한 삶에도 꽁트거리라는 나름의 효용은 있는 셈이다.


"출판사가 제일 좋아하는 필자가 누구인지 아니?" 언젠가 모셨던 어느 편집장 선배가 내게 물었다. 그 선배의 말버릇은 자문자답이었고 금방 답이 나왔다. “책을 다 쓰는 필자야.” “네?”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물었다. 필자인데 책을 다 안 쓴다고? 


“원고를 다 완성하지 못하는 필자가 대다수야. 거기다 마감 날짜까지 지키면 더 베스트고." 책이 나오기 전엔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책이 나와 보고 나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주 잘 알게 되었다. 그 면에서 봤을 때 이번 주에 늦은 건 계속 부끄러운 일이고 책 출간은 나에게 계속 좋은 경험이었다. 다음에는 책 나온 이야기를 적으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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