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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Nov 29. 2015

좋은 구두

좋은 곳으로 데려다 주든 말든



처음 제대로 된 구두를 샀던 곳은 런던이었다. 이 문장만 보면 도회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삶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간 구두 가게는 새빌 로나 해로즈 같은 곳이 아니라 캠든 근처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마켓 안의 중고 구두 가게였다. 헌팅 캡을 쓰고 코가 붉은 늙은 남자가 호텔 화장실 정도만한 가게에 앉아 있었다. 물건을 파는 일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남이 신던 구두 가게라도 영국에 있으니까 처치스(Church’s)도 있고 크로켓 앤 존스(Crockett and Jones)도 있었다(둘 다 고급 구두 브랜드다. 처치스는 영국 대사와 정치인들이 많이 신었다. 크로켓 앤 존스는 지금 007이 신고 있다). 그때의 나는 그 정도의 고급 구두를 실물로 본 적이 없어서 좀 감탄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중고 벤틀리를 못 사는 것처럼 그때의 처치스는 중고여도 내가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의 나는 거기서 뭐라도 사고 싶었다. 런던에서 구두를 샀다는 사실을 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싼 것을 찾다가 브랜드 없는 옥스포드 구두까지 갔다. 그 구두는 밑창의 바느질이 낡아서 오래 신은 축구화처럼 인프론트 킥을 차는 부분이 터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뭐라도 사고 싶어서 스스로를 설득했다. 발에 잘 맞고 가죽은 좋다고, 터진 밑창은 나중에 고칠 수 있다고. 할아버지는 35파운드를 불렀고 나는 30파운드까지 깎았다. 깎아서 좋았지. 그때만 해도 이국의 벼룩시장이나 중고품 가게에서는 좋은 물건이 싸게 나온다는 말을 믿었다. 그런 건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난 꽤 많은 벼룩시장을 돌아야 했다. 


그 구두를 사오고 7년쯤 지나서야 나는 그 구두를 고칠 수 있었다. 그동안 나와 나의 도시는 꽤 많이 변했다. 나는 직업을 갖게 됐다. 어른이 되는 건 구두를 신을 일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결혼식과 장례식, 장례식과 결혼식. 벌어지는 구두의 틈새도 더 신경 쓰였다. 마침 서울엔 고급 구두 전문점과 수선점이 문을 열었다. 그 전에는 제대로 만든 구두를 맘 먹고 고치려면 외국에 수선을 맡기고 우편으로 받아야 했다. 이렇게 된다면 총 비용은 웬만큼 좋은 구두 값을 넘기지만 난 비효율에 크게 상관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니까 저축도 못하고 이 꼴로 살고 있지만. 아무튼 나는 그 구두를 고쳤다. 어릴 때 사온 중고 구두의 밑창을 갈자 우습게도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다페스트에서도 구두를 산 적이 있다. 헝가리에 자동차 시승 출장 갔다 잠깐 시간이 남았을 때였다. '부다페스트에서 좋은 구두를 산다'면 왠지 이국적인 느낌인데(나만 그렇다면 미안합니다) 그때 갔던 구두가게는 생김새부터 훌륭했다. 오래된 상점가 사이의 가로로 넓은 건물 1층에 있었다. 유리창이 넓어서 훤히 보이는 가게 안에는 실로 잘 염색된 가죽 구두들이 신사가 다리를 꼰 것 같은 각도로 놓여 있었다. 인테리어도 구두밖에 없었다. 1층은 구두, 2층의 인테리어는 도서관처럼 쌓아둔 구두 상자. 그런 가게 안에 앉아 흠흠 하고 기다리며 구두를 신어보는 건 근사한 일이었다. 뭔가 살 때 근사한 기분이 드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구경만 하겠다며 동행하신 모 브랜드의 부장님도 한 켤레 샀다. 잘 신고 계신지 모르겠다. 


그때는 비브람 밑창을 단 갈색 노르웨거(Norweger) 구두를 샀다. 남자 구두도 여자 파마처럼 종류가 많고 이름도 각각 다 붙어 있으니 그러려니 하시면 된다. 그 구두는 같은 가격의 서유럽 브랜드보다 훨씬 품질이 좋았다. 가죽도 좋은 걸 쓰고 바느질도 세심했으며 사이즈 구분도 더 촘촘했다. 서비스도 훌륭했던 중년의 판매원은 계산할 때 세금 환급용 서류를 만들어달라고 하자 "현금을 내면 우리가 그만큼 깎아주겠다"고 말했다. 먼지 하나 없이 잘 무두질된 가죽 냄새만 나는 매장에서 그런 제안을 들으니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켕겨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현금도 없었고.


그때 나는 만 서른이 되기 조금 전이었다. 30대가 되면 구두를 신을 일이 많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격식 차린 구두처럼 생겼으면서도 편하게 신기 좋도록 미끄러운 창이 아니라 비브람 창이 달린 구두를 산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른 넘은 분들은 아시다시피 서른이 되자마자 막 다음날부터 어른스러움을 증명해야 할 일들이 세금처럼 기다렸다는 듯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 구두는 아직 열 번도 안 신었다.


방금 이야기한 것 말고도 몇 켤레 더 샀다. 온라인, 오프라인, 모국, 타국, 아무데서나. 허무한 마음을 카드빚으로 달래던 때다. 그래서 몇 켤레는 남에게 주기도 했다. 그 구두를 다 닳을 만큼 신으려면 평생 신발을 더 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 구두를 보면 홀린 듯이 카드 번호를 입력하던 때가 떠올라 기분이 짠해져서. 일 덕에 좋은 구두를 많이 보았다. 구두를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니 좋은 구두에 대해 약간의 첨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구두의 정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예술과 외설 사이의 판결문과 비슷하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보면 안다." 좋은 구두는 신어보면 안다. 내 발에 잘 맞는 구두는 들어갈 때부터 느낌이 다르다. 내 발의 폭과 길이에 잘 맞고, 발 주변에서 헐겁게 돌지 않을 정도로 내 발에 밀착되면서도 너무 세게 발을 압박하지 않는 구두를 신으면 발 뒤꿈치까지 구두에 다 넣었을 때 기분 좋게 공기가 빠져나가며 "슉"하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와 느낌을 기억한다면 좋은 구두를 고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사이즈를 제외하면 좋은 구두를 결정짓는 모든 요소는 가격과 연결된다. 비쌀 수록 호사스러워진다. 가죽이 좋아지면, 바느질을 촘촘히 하면, 창과 가죽 사이의 단차가 없다면, 똑같이 훌륭해도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으면, 더 비싸진다. 저 요소를 다 갖췄다면 더 비싸고. 이 중 적당히 자신의 상황에 맞는 구두를 고르시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요약: 발에 잘 맞는 게 우선이고 비싼 건 이유가 있다.


어쩌면 당신은 '구두를 사볼까' 싶어서 검색을 하시다 이 글을 읽게 됐는데, 지금쯤 '아 그래서 지금 뭐 사라는 거야. 외국에서 구두 샀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싶은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다. 그럴 리가요. 허영 경험은 자랑할 게 못 된다. 이 자리에서 적정 가격과 적절한 브랜드를 말할 생각도 없다. 내 이야기에 내가 뭔가 붙이려니 민망하지만 이 이야기에 교훈이라는 게 있다면 작은 취향 하나가 생기는 데도 생각보다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급 구두의 조건 같은 건 잘 모르고 살아왔더라도 상관없다. 다른 쪽에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의미일 테니까. 다만 살다 보면 값을 좀 주더라도 좋은 구두가 필요할 때가 있긴 하다. 만약 당신도 이 말에 동의한다면, 그런데 겸사겸사 좋은 구두가 필요해졌다면 검색을 할 게 아니라 서울의 구두 전문점에 가 보시길. 이제 서울에도 근사한 구두 가게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남자 구두가 너무 비쌀 필요가 있을까 싶다. 물론 세상엔 아주 비싼 구두를 신어도 상관 없는 사람들이 있다. 1년 내내 한 번도 젖은 바닥을 걸을 필요 없이 기사 딸린 차를 타는 사람이라면 존 롭(John Lobb)의 구두같은 것만 신어도 문제없다. 하지만 매일 대중교통 타고 열심히 걸어서 회사 다니거나 내 일 열심히 하는데(존 롭을 신는 게 대충 산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굳이 엄청나게 비싼 구두를 사고, 이 비싼 구두가 왜 비싼지 알아보고 즐거워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차피 구두는 당신을 아무데도 데려가 주지 않는다. 당신을 움직이는 건 당신의 발이다. 그러니 구두는 역시 발이 편한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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