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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May 02. 2016

어느 관찰자와의 이야기

야생 영장류학자 김산하 인터뷰


한국 최초의 야생 영장류학자 김산하는 2년 동안 인도네시아의 밀림에서 자바 긴팔원숭이를 관찰하고 <비숲>을 썼다. 그는 원숭이를 관찰하며 인간을 생각했고 야생 경험의 한복판에서 인간 문명의 본질을 떠올렸다. 다음은 그 관찰에 대한 이야기다.


<비숲>은 언제 어디서 일어난 일에 대한 책인가?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약 2년 간의 자바긴팔원숭이 현장 연구에 대한 책이다. 


그 연구를 통해 새로 발견한 것이 있나?

영장류는 많이 연구가 된 편인데도 자바 긴팔 원숭이는 30년 이상 제대로 된 데이터가 없었다. 희한할 정도로 연구가 안 되어 있었다. 국제학계에서도 “특이하다”는 이야기 정도만 나올 정도로. 이번 연구는 우선 알려지지 않았던 종의 행동학적, 생태학적 데이터를 모았다는 의미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발표할 가치가 있었다.


꽤 의미가 있는 일이겠다.

어떤 동물이든 그 종이 어떻다는 말을 하려면 개별 데이터가 쌓여야 한다. 우리도 거기에 큰 퍼즐 조각을 보탠 셈이지.


긴팔원숭이 집단의 특징은 무엇인가? 

단순한 집단 생활이 아니라 그 안에 사회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갈매기 무리는 크지만 정교하지는 않다. 긴팔원숭이 세계에는 아주 작은 단위 그룹에서 이루어지는 긴밀한 사회관계가 있다. 


당신은 몇 개의 그룹을 관찰했나? 

세 개다. 이 그룹들이 밀림이라는 하나의 큰 서식지에 있으니까 비슷한 패턴으로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웃하는 그룹 사이에도 무엇을 먹고 어디에 어떻게 시간을 할애하는지는 상당한 차이가 있더라. 각각의 영장류 그룹이 비슷한 걸 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걸로 두 번째 논문을 냈다. 긴팔원숭이들이 먹이를 찾을 때 나름의 체계적인 전략을 가질 거라는 가설을 만들고 그걸 증명하려 하기도 했다. 그 가설을 지지하는 결과도 일부 얻었고.


하긴 모든 가정이 다 다르니까. 자바긴팔원숭이 집단을 인간화된 가족구조라고 표현할 수 있나?

인간도 정확히 말하면 일부일처제는 아니다. 오히려 평균치를 매기면 약한 일부다처제에 해당된다. 어쨌든 성인 남녀 둘에 애들이 딸린 가족이 긴팔원숭이의 가장 흔한 팀이다.


그건 핵가족 제도 아닌가? 

‘핵가족 형태를 취한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유전자검사를 해보면 친부모가 아닐 때도 있어서. 엄마와 아빠가 애를 낳았다가 부모 중 하나가 새 파트너를 받아들이면서 쫓겨난다든가 할 때도 있다. 인간도 점점 그렇게 되고 있지 않나? 양자를 맞이한다든가.


원숭이의 이혼이나 재혼 같은 건가? 

거의 그런 거지. 재혼 이혼을 하면서 분가도 하고. 요즘 시대에 볼 수 있는 가족이다. 바람이 나서 싸움이 벌어지면 그 갈등 때문에 집단이 무너진다거나 갑자기 소원해진다거나.


실제로 바람이라는 게 나나?

인간처럼 다른 수컷과 암컷이 바람을 피운다. 다른 집단의 암컷과 수컷이 성행위를 하는 것이 관찰된 적이 있었다. 사회관계에 의존하지만 그 관계 때문에 고생도 한다. 그런 식의 모습이 얼마나 우리와 비슷한지 알 수 있다.


존 치버의 단편 같다. 긴팔원숭이를 연구하며 인간 관계를 되돌아보기도 하나?

인간 관계를 고찰하는 것은 영장류 연구의 의미 중 하나기도 하다. 동물 중 하나인 인간의 보편성과 인간만의 고유성을 동시에 보게 되니까. 예를 들어 긴팔원숭이는 보통 남편들끼리 싸우고 암컷들은 뒤에서 응원하다시피 소리를 지른다. 하루는 어떤 수컷이 싸우다가 뒤로 물러나서 먹기만 하다가 암컷에게 머리를 한 대 맞았다. 스스로의 구실을 못하면 파트너에게 무시를 당한다. 인간관계와의 유사함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요즘 유행하는 ‘아웃도어’나‘익스페디션’을 실제로 하고 온 사람이기도 하다. 문명 세계는 아웃도어의 이미지를 하나의 패션으로 쓰는데 당신은 진짜 아웃도어에 머물다 왔다.

브라이틀링이나 제임스 본드가 상징하는 멋이 있지 않나. 현장과 거칠게 부딪히며 남성성을 유지하는 것이. 나도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 잡지 같은 곳에서 말하는 ‘아웃도어’는 마지노선의 쾌적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내 연구는 말 그대로 자연과 뒹구는 것이었다. 매일 피와 땀과 진흙에 쩔어 있었다. 극단적으로 자연과 합일한 거랄까.


현장과 거칠게 부딪히는 남성성의 멋. 브라이틀링 광고. 


장비 이야기도 해보고 싶다. 실제로 밀림에 가면 어떤 자동차를 타나?

중고 오펠을 샀다. ‘블레이저’라는 차였다(인도네시아에서 오펠 엠블럼을 달고 출시된 쉐보레 블레이저였다). 4륜구동은 아니었지만 차고가 높아서 바닥이 바위에 부딪히지 않았다.


방금 말도 SUV 브랜드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다. 4륜구동이 아니라도 정글을 지날 수 있나?

숲을 막 뚫고 가는 게 아니거든. 그러면 안 된다. 이미 나 있는 안 좋은 길을 갈 뿐이다.


정리하면, 이미 나 있는 안 좋은 길을 간다면 4륜구동이 아니어도 된다?

4륜구동이면 좋지. 예산이 빠듯해서 그 차를 골랐다. 4륜구동은 아니어도 되지만 차고가 낮으면 안 된다. 길에 포장이 안 되어 있으니까 진흙 바닥과 웅덩이에 빠질 때가 많은데 그때는 ‘4륜구동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바닥에 끼면 계속 바퀴가 헛돌기만 하고 타이어가 타기도 하니까. 


시계는 어땠나? 가장 비싼가?

디지털 시계가 필요해서 일괄적으로 타이멕스를 썼다. 가장 비싼 장비는 쌍안경이다. 과학자에게는 쌍안경이 가장 소중하다. 근접 관찰을 하면 원숭이들이 도망가니까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찰해야 하기 때문에. 쌍안경은 스와로브스키를 썼다. 솔직히 말하면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그립감도 좋고, 약간 녹색 계열이고. 탐험 느낌에 맞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스와로브스키 옵틱의 쌍안경. 탐험 느낌. 


나는 <비숲>에서‘현실은 충분했다. 증강현실, 가상현실, 강화현실 모두 불필요했다’는 구절이 무척 좋았다. 유사 현실은 결국 비현실이다. 극도의 현실을 살다 온 사람이 그 부분을 짚었다.

3D 애니메이션은 물결, 햇빛, 나무 질감 등을 엄청난 기술로 표현한다. 굉장한 우회로지. 가서 직접 보면 될 텐데 왜 굳이 그것을 해야 할까? 요즘의 증강현실은 현실에 기반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거나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현실을 궁핍하게 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미디어를 통해 상상을 확장시키는 게 아니라 현실을 축소시킨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초라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은 문제다. 그럴수록 우리 모두 초라해질 뿐이다.


상품화된 자연엔 불편이 빠져 있다. 보통 밀림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국적인 동물이나 색깔 정도다. 하지만 당신이 실제로 겪고 온 밀림에는 두드러기나 벌레같은 불편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상현실은 결국 보기 편하게 표백된 현실 아닐까?

냉방이 잘 되는 크루즈선 안에서 바깥 경치를 즐기는 셈이다. 크루즈선 안에서 경치를 즐길 수도 있지만 그 경치가 진짜는 아니다. 그러다 보면 실제 앞에서 거부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섹스를 하면 생각보다 이상한 체취를 맡거나 어색한 자세를 하거나 그 사람의 이상한 면까지 봐야 한다. 그게 다 진짜인데. 현실과 유리되어 실제와 거리감이 생기는 게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은 밀림에서 남성잡지를 봤다고 쓰기도 했다. 이게 무척 흥미로웠다.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유사 현실 세계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사실 남성잡지를 비롯한 패션잡지는 이미지만 남아있는 세계의 극한일 수도 있다. 

자연 속에 완전히 파묻혀 있다 보면 인류의 모든 것에 의미를 찾기 힘들어진다.과학도 철학도 문학도 패션도. 동물은 그런 갈증과 결핍을 전혀 느끼지 않으니까 더 외롭다. 사람은 정신적인 것, 뭔가 형이상학적인 것을 갈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책도 많이 읽었지만 가끔 오감을 충족시키는 문명세계의 산물을 접하고 싶을 때가 있다. 흔히 말하는 스타벅스같은 건 아니고, 정신적인 동시에 예술적인 측면을 보고 싶어진다. 남성잡지에는 그런 욕구를 종합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게 있었다. 온갖 인간의 패션, 라이프스타일의 세계, 트렌디한 것을 추구하는 사실을 본다는 것 자체가 좋을 때도 있었다. 너무 극단적인 자연으로 가서 인간 세계와 유리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글을 분모로 하고 분자로 (남성잡지를)조금씩 취하는 것 정도는 좋았다.


균형추 개념의 남성잡지라…

밀림에서 너무 대충 살기는 싫었다. 패션이나 라이프스타일에는 ‘더 잘 살려는 의지’가 있다. 그 의지가 담긴 게 사치품 세계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디에 있던 망가지지 않으려 하는 것. 


망가지지 않으려는 것, 미를 추구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미를 추구하는 것이 꼭 현대만의 산물도 아니다. 원시인들도 생존과 관계 없는 화풍으로 라스코 벽화를 그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미를 추구하고, 스타일을 추구하고, 성 선택적 입장에서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남들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구가하고. 그런 것들.


진짜 밀림이 준 교훈이 있나?

나는 ‘정글의 시작’이라는 개념에 로망이 있었다. 어디부터인가 들판이 끝나고 밀림이 시작될 텐데 그 경계가 얼마나 멋있을까. 뭐든지 어딘가에 그런 진짜가 있다. 그 진짜를 보고 오니까 내 자아가 무한대로 확장된 기분이 들었다. 동물이 준 특별한 메시지가 있다기보다는 동물과 서식지의 존재 자체가 교훈이다. 우리는 진짜를 추구한다. 빈티지를 원하고 빈티지처럼 보이는 걸 싫어한다. 정말 진짜에 대한 추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여기는 밀림이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나? 

많이 불편하지. 제일 불편한 건 소음이다. 그 중에서도 카톡 소리. 


그 “까똑, 까똑”하는?

그거다. 일단 카카오톡이란 말 자체가 너무 공허하다. ‘카카오’와 ‘톡’은 의사소통에 아무 의미가 없는데. 그런 식으로 아무 의미 없는 두 말이 붙어 있는 것부터 상징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 연속적인 소리는 온갖 불필요한 메시지가 온갖 불특정 다수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오가는 걸 상징하는 것 같다. 소리까지 경박하고. 


밀림의 관계와 이곳의 관계를 비교했을 때 느낀 점이 있나? 

개들도 산책을 나가서 마주치면 난리가 난다. 새들도 자기들끼리는 밀접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인간은 희한하다.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매일 마주치는데 말을 걸면 이상한 게 된다. 아무리 배를 굶주린 상태에서 맛있는 걸 보았다고 해도 상황에 따라 눈을 돌려야 하고.


생물학적 욕구를 억제하는 것 역시 망가지지 않는 것, 미의 추구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그 역시 본능 아닐까?

이렇게 강한 자극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억제한 적은 없다. 인간의 진화 메카니즘은 홍적세 무렵에서부터 왔다고 여겨진다. 그때는 인류가 살면서 가장 많이 만났던 사람의 수가 1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100명의 얼굴을 기억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했는데 지금은 몇 명인가. 이 정도면 초자극(hyper stimulus)이다. 그 안에서 계속 파묻혀 살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종류의 자극에 맞닥뜨렸다는 건가?

그렇다. ‘멀티 태스킹’은 사실 자기를 점점 죽이는 것일 지도 모른다. 온갖 걸 동시에 보고 있다는 건 어느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실제로 몇 개의 모니터를 켜놓고 보는 사람에게 끝나고 나서 물어보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단순한 게 중요하다?

인간의 묘미는 우회적으로 단순해지는 거라고 본다. 야생동물처럼 원래부터 단순한 게 아니라. 문학과 예술과 철학과 과학을 겪어서, 한마디로 하늘로 올라간 후에 다시 내려오는, 그 면이 인간의 맛인 것 같다. 단순함을 깨닫는 거지. 모든 방향으로의 추구가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뭐든 끝까지 추구하면서 어떤 ‘풀 서클’을 도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단순한 결론을 내기 위해서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그렇다. 인간의 의미는 거기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지 <루엘>에 실렸던 원고를 조금 고쳤습니다. 


<비숲>은 이런 책입니다. 재미있고 아름다운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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