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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Jun 20. 2016

내 손 안의 옛날 남자

5억개가 팔린 지포 라이터 이야기


<딥 블루 씨>, <황혼에서 새벽까지>, <호커스 포커스>, <오션스 13>, <엑스맨: 더 데이즈 오브 퓨쳐>, <인디아나 존스>, <펄프 픽션>, <스콜피온>, <화성침공>, <맨 오브 아너>, <러시>, <2 건즈>, <배리드>, <미녀삼총사>, <고스트 라이더>, <캡틴 아메리카>, <워크 더 라인>, <월-E>, <왓 우먼 원트>, <아웃 오브 사이트>, <트와일라잇 사가>, <쥬라기 공원>, <웨딩 싱어>.


이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지포 라이터가 나온 적이 있다는 점.


지포 라이터는 신기한 물건이다. 스카치 테이프 수준의 고유 명사인데도 세부적인 요소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들여다보면 더 신기하다. 창업 100여 년이 된 지금까지도 딱히 변하지 않았다. 글로벌 브랜드인데도 미국에서 생산한다. 단순한 미국산이 아니라 이들이 처음 지포 라이터를 만들었던 바로 그 동네인 브래드포드에 공장이 있다. 소유주도 지금까지 똑같다. 지금 지포를 이끄는 사람은 창업자 조지 블리즈데일의 외손자 찰스 듀크다. 때맞춰 변하기도 쉽지 않지만 이렇게 안 변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지포 라이터는 아무튼 엄청나게 많이 팔렸다. 2012년 지포 라이터의 누적 생산량은 5억개를 돌파했다. 아주 꾸준한 성공이다. 지포는 1969년 1억 개를 팔고 나서부터 1988년 2억 개, 1996년 3억 개, 2003년 4억 개 판매를 넘긴 이후 9년 만에 5억 개를 판매했다. 본사 근처에 딱 하나 있는 지포 라이터 공장에서는 하루에 6만~7만 5천 개의 라이터를 만든다. 인구 1만 명 규모의 시골 마을에서 전 세계로 아이코닉한 물건이 퍼져나간다.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처음부터 이러지는 못했다. 지포 라이터의 첫 달 판매 개수는 82개, 액수로는 62.15달러였다. 함께 일하던 브래드포드의 직원들에게 월급을 못 줄 정도였다. 하지만 지포와 함께 하던 직원들은 "오, 괜찮아요 조지. 괜찮아 질 거에요."라고 말하며 블리즈데일을 격려해 줬다고 한다. 조지 블리즈데일은 그때의 신세를 잊지 않았다. 전 세계에 5억 개가 넘는 라이터를 퍼뜨린 지금도. 지포 라이터는 아직도 브래드포드 공장에서 만든다.


나는 <루엘>에서 일하던 때 지포 라이터의 초대를 받아 브래드포드의 공장에 다녀왔다. 안정적인 대량 생산 시스템은 실제로 보니 감동적인 구석까지 있었다. 40년이 넘은 프레스 기계들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놋쇠를 찍어내고 케이스의 몸체와 뚜껑을 만들고 힌지를 붙여서 지포 라이터를 조립한다. 공장 곳곳엔 20년씩은 근무한 숙련공들이 앉아 있다. 그들이 능숙하게 눈과 손을 움직이면서 불량품을 걸러 내거나 완성된 케이스를 정리한다. 지포는 이런 식으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의리 있는 자본가, 성실한 숙련공, 농익은 대량 생산 시스템, 튼튼한 물건. 좋은 이야기다.


지포 라이터는 요즘 너도나도 말하는 혁신의 결과물은 아니다. 창의적인 물건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분류상 기름을 넣는 오일 라이터에 속하는데 이쪽의 원조는 오스트리아의 임코 라이터다. 지포라는 이름도 렉서스나 코닥처럼 깊이 생각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지퍼'의 어감이 좋아서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좋은 이름이나 물건의 독창성 때문에 상징적인 물건이 되는 건 아니다. 사실 아이콘의 가장 큰 조건은 통제도 예상도 안 되는 행운이다. 지포의 행운은 전쟁이었다.


지포 라이터는 2차 세계 대전과 함께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지포의 큰 장점은 단순한 구조와 뛰어난 내구성이다. 이 둘은 훌륭한 군용품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전쟁과 전투는 고통스럽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판단의 끝단에 있는 전투 현장에선 더욱 그렇다. 거기서 느끼는 개인적인 고통만은 승자와 패자, 침략자와 인질 누구에게나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아무튼 누군가 참전했다면 고통을 줄일 뭔가가 필요했다. 그 중 하나가 담배였다. 담배를 피우려면 불이 필요했다. 즉 미군이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는 건 지포가 외국으로 나간다는 뜻이었다. 비약하면 일본의 진주만 침공이 지포의 세계화를 부른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본은 지포의 가장 오래되고 충성스러운 해외 시장이지만.


지포의 빈티지 모델은 지포와 전쟁의 강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역사가 긴 물건답게 다양한 빈티지 지포가 시중에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쓰던 지포다. 미군들은 이태원에서 베이스볼 점퍼에 자수를 놓던 것처럼 베트남에서 지포 라이터에 스스로의 온갖 자아를 새겼다. "나는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을 안다. 왜냐하면 지옥에서 시간을 보냈으니까."같은 건 시적인 편인다. 베트남 지도, 복무 연도, 난폭한 성욕, 이런 것들이 새겨진 지포 라이터가 아직 비싼 값에 거래된다.


지포는 미국이 가진 여러 요소 중 애국심과 강하게 연결된다. 지포는 크고 튼튼하고 눈에 띄는 광택을 내며 한번 사면 평생 고쳐 준다. 이건 헐리우드 영화 같은 걸 이용해 미국이 자국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이상적인 삶과도 닮아 있다. 큰 집, 큰 차, 넉넉한 삶,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한 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온 나라가 움직일 거라는 약속. 지포는 손바닥 속의 팍스 아메리카나일지도 모른다.


지포 공장 출장 프로그램 중에는 지포 박물관 투어도 있었다. 지포에 50년 이상 근속한 린다 씨가 안내해 준 투어를 보던 중 프랑스인 필립은 눈물을 흘렸다. "지포를 전쟁에 갖고 나간 남자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서"였다. 투어가 끝나고 독일인 루카스는 진절머리를 냈다. "이렇게 국가, 국가, 국가가 물건과 바짝 붙어 있는 브랜드는 세상에 처음 봐서"였다. 둘 다 맞다. 세상에 100%의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포도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지포를 어떤 물건이라고 정의하기 좀 부담스럽다. 어떤 방향으로든.


다만 지포에 100% 일관성은 있다. 지포는 아주 남성적인 이미지다. 대부분의 지포는 남자가 산다. 여자가 산다면 남자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주 미국적인 물건이기도 하다. 우디 앨런의 미국이 아니라 브루스 윌리스의 미국이 진하게 묻어 있다. 불은 담배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담배는 불을 꼭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지포는 담배와도 연결된다. 실제로 지포 본사에서는 2015년까지 자유롭게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이 요소들을 모으면 하나의 캐릭터가 남는다. 옛날 남자.


지포 라이터는 실로 옛날 남자 같은 물건이다. 담배를 뻑뻑 피우고 라이터로 촷촷 소리를 내며 불을 붙이고 술자리에서 목소리가 커지는. 여자를 이해하지는 못해도 지켜주려 하고, 고민하는 대신 실천하며, 자신이 잘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대신 자신에게 끝없이 할 수 있다고 최면을 거는 남자. 종종 허풍은 떨어도 진지한 약속은 어기지 않는, 디자이너 브랜드 대신 브룩스 브라더스를 입는,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건 바꾸지 않는 옛날 남자.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알 파치노와 비슷하다. 그 캐릭터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비판 받을 구석이 많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 알 파치노는 좋은 정장을 입고 멋진 탱고를 출 줄 알고 여자에게 예의를 갖출 줄 아는 남자다. 어떤 여자들은 아직 그런 남자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지포 주변을 살펴보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콘이 된 당사자인 지포가 한 일은 딱 둘 뿐이다. 좋은 원칙을 만든 것, 그 원칙을 지킨 것. 창업자의 외손자 조지 B. 듀크 씨 역시 지포의 정신을 잇고 있다. 그는 나와 만났을 때 "우리는 브래드포드의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줬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외할아버지는)지포를 잘 만들라고 말했어요. 늘 품질을 유지하라고 이야기해줬어요. 그리고 늘 회사를 건강하게 유지하라고도 말해줬어요. 이건 재정적인 걸 뜻하기도 해요. 우리는 늘 재무에 신경을 써요. 돈을 빌리는 것에 아주 아주 민감해요." 이게 전부다. 나쁠 때나 좋을 때나 한결같이 튼튼한 물건을 만든 것,함께 일한 사람들과 계속 함께한 것. 제대로 된 물건과 동료들 말고는 어디로도 한눈 팔지 않은 것.


당신은 팍스 아메리카나와 전쟁과 담배와 옛날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방식을 싫어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포가 상징적인 물건이라는 사실은 아직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은 담배를 안 피우지만 나도 아직 종종 내 지포를 만져 본다. 적당한 무게,가장자리의 부드러운 곡면, 여닫을 때마다 들리는 챙, 딸깍 소리, 5억 개를 만들며 쌓여 온 경험이 담긴 물건을. 그걸 느끼다 보면 이게 왜 인기를 끄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튼튼하고 믿음직스러우니까. 약속을 계속 지키니까. 그런 물건은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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