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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Jun 21. 2016

좋아서 만든 물건

무념의 히트상품 고프로

©Gopro


고프로 CEO 닉 우드먼의 삶이 (이를테면 마윈처럼) 아주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대학 전공은 시각예술과 창의적 글쓰기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는 회사에 지원하지 않고 인터넷 마케팅 회사를 열었다. 결과는 실패. 그 후엔 속 편하게 장기 해외 여행을 떠났다. 발리에서 액션캠의 아이디어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거물 은행가였다. 우드먼은 아버지의 투자금으로 고프로를 만들었다. 결과는 대박. 와우.


하지만 삶은 그렇게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적어도 아주 쉽지는 않다.


닉 우드먼은 캘리포니아 출신이다. 그가 캘리포니아 출신이라는 사실은 김윤진이 한국 출신이고 오아시스가 맨체스터 출신이고 JY LEE가 안양 출신이라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100%까지라고는 못해도 환경은 인간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가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뉴욕이나 부다페스트 출신이었다면 고프로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캘리포니아는 그에게 서핑을 안겨 주었다.


닉 우드먼은 서핑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손꼽히는 명문고등학교인 멘로 스쿨 출신이다. 그는 1915년에 창립한 학교 역사상 최초로 서핑 클럽을 만들었다. 서핑 클럽 기금을 모으기 위해 고등학교 때부터 티셔츠도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의 삶은 어릴 때 나타난 패턴의 확장과 반복인 경우가 많다. 닉 우드먼도 그랬다. 방금 묘사한 일들은 고프로와 닉 우드먼 주변을 계속 돌아다니는 주제어다. 스포츠, 적극성, 상인 기질.


멘로 스쿨은 미 서부의 고등학교 중에서도 아이비리그 진학률이 높다고 한다. 하지만 멘로 스쿨 서핑부 초대 회장 닉 우드먼이 바닷가 아닌 곳에서 20대를 보낼 리는 없었다. 추운 동부 해안에서 파도를 타고 싶어 할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캠퍼스에서 바다가 보이는(설마 그래서 간 건 아니겠지만)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 대학에 갔다. 전공은 시각예술과 창의적 글쓰기. 명문 기업 취업이나 스타트업 대박을 노릴 인생 느낌은 여전히 들지 않는다.


실제로 고프로는 요즘 나오는 대박 스타트업과는 여러 모로 다르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고프로가 제조업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건 대단히 중요하다. 지금 당신이 이름을 댈 수 있는 신흥 대기업을 떠올려 보자. 그 중 손에 잡히는 것을 만드는 회사가 어디인지 솎아내 보자. 고프로, 다이슨, 발뮤다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다. CEO의 출신 배경도 다르다. 제프 베조스, 마크 주커버그,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등의 스타트업 거물들은 거의 다 컴퓨터나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출신 대학이나 대학 전공 역시 한 인간을 말할 때 아주 중요한 변수는 아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대학 시각예술과 창의적 글쓰기 전공이 다른 스타트업 영웅의 전공과 꽤 달라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인터넷 마케팅 회사를 차렸다 곧 망했다. 회사를 차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마케팅 회사 같은 걸 하려면 관계망에 기반한 충성스런 고객층이 있어야 한다. 애초부터 대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이 하기엔 무리인 일이다. 서핑부 회장님(왠지 이 호칭으로 부르고 싶다) 닉 우드먼은 별로 낙심하는 기색도 없이(나와 당시 심경을 이야기해본 건 아니지만 별로 안 낙심했을 것 같다)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는 5개월 동안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네시아 발리를 여행했다. 이곳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서핑 명소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렇지.


회장님의 선견지명. ©Gopro

하지만 닉 우드먼이 인도양의 파도와 바람을 느끼며 나시고렝이나 먹으러 발리까지 간 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의 사업 아이템을 착실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2001년에 고프로의 원형이라 할 만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가 리쉬(서퍼가 발목에 감는 벨크로 밴드. 서프보드와 몸을 이어준다)에 35mm 자동 필름 카메라를 묶은 후 그걸 손목에 감고 거울 앞에서 셀피를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고프로의 사상적 원형은 이미 그때 완성되어 있었다.


닉 우드먼은 발리에 가면서 여러 종류의 카메라를 챙겼다. 직접 서핑을 하면서 스스로의 아이디어를 체크해 보기 위해서였다. 집 근처에서도 서핑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왜 거기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겸사겸사 자아도 찾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이 아이디어로 진지한 상품을 만들기로 했다.


즉 고프로는 FGI를 포함한 시장조사나 데이터 마이닝 같은 것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정 반대다. 멘로 스쿨 서핑부 초대 회장님이 계속 정신 못 차리고 서핑 하다가 ‘이런 거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싶어서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 어떤 분야를 좋아하는 사람이 실질적인 필요와 필드 테스트를 거치고 만든 물건은 좀 다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계산기 두드리며 만든 물건 역시 쓰다 보면 결국 어딘가에서든 티가 난다.


고프로는 2004년 샌디에이고 액션 스포츠 리테일러 트레이드 쇼에서 처음 선보였다. 데뷔 무대만 봐도 이 물건이 애호가 기반의 제품인 걸 알 수 있다. 초기 고프로는 카메라도 아니었다. 닉 우드먼의 아이디어였던 ‘손목에 감기는 카메라 하우징’에 가까웠다. 하드웨어보다는 하우징에 가깝다는 점, 몸을 비롯해 유저의 근처 곳곳에 밀착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지금까지 나타나는 고프로의 특징이다.


이런 이야기의 결말이 ‘알고 보니 아버지가 큰 부자였다’ 라면 꽤 허탈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닉 우드먼의 아버지 딘 우드먼은 부자였다. 그가 은행가였던 건 사실이다. 보통 은행가도 아니었다. 딘 우드먼은 메릴린치 서부 지역 디렉터로 16년 동안 일하다 자기 이름을 건 투자은행을 만들고 펩시가 타코벨을 인수하는 거래에 브로커를 할 정도의 거물이었다. 딘은 1929년생, 닉은 1975년생이다. 늦둥이 아들 닉이 서핑을 하든 첫 회사 경영을 실패하든 크게 뭐라 할 것 같지는 않다.


“너 커서 뭐 할래?” ©Gopro

다만 닉 우드먼이 아버지에게 받은 실질적인 도움이 얼마인지는 볼 필요가 있다. 그가 고프로를 홍보하며 처음 가지고 다닌 차는 1971년식 폭스바겐 미니버스였다. 아버지가 그에게 지원한 돈도 10만$, 얼추 1억원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 더해 어머니에게 3만5천$, 자기 돈 3만$정도를 붙여서 고프로라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큰 돈이다. 하지만 ‘에 그게 뭐야. 아빠 돈으로 성공을 샀네’라고 할 정도의 액수는 아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고프로는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내가 고프로를 재미있어하는 이유는 이 물건이 기술에 기반하지 않은 발상의 물건이기 때문이다. 고프로는 철저하게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각되고 태어난 아이콘이다. 카메라 업계에는 이미 종주국 서유럽을 물리치고 시장을 차지한 일본의 니콘과 캐논과 소니가 있다. 그쪽의 카메라는 더 작게, 빠르게, 화질이 좋게 하는 기술에 치중했다. 숫자로 표현되는, 사진기 애호가에게 어필하면서 일반 사용자에게는 조금씩 멀어지는 매력 포인트다. 반면 고프로의 기본 개념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간단하다. 사진기는 그림을 만드는 물건. 우리는 아웃도어 카메라. 그러니까 우리한테 중요한 건 크기, 내구성, 방수, 장착 확장성. 고프로는 이 특징만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물건이다. 닉 우드먼의 외길 서핑 사랑처럼.


고프로의 가장 큰 약점 역시 기술에 기반하지 않은 발상의 물건이라는 점이다. 액션캠은 혁신이 아니라 실행력의 산물이다. 핵심 개념에 특허를 낼 수도 없으니 따라 하는 걸 막을 수도 없다. 하드웨어의 명가 소니는 이미 기술을 잔뜩 끼얹으며 고프로의 라이벌이 되었다. 고프로의 주가는 서퍼의 파도처럼 찼다 빠졌다를 반복한다. 애플이 카메라 특허만 내도 고프로의 주가는 폭락한다. 더 싼 것도 많다. ‘짭프로’에 이어 ‘짭짭프로’까지 나왔다. 하지만 고프로에게는 시장 선점이라는 재산이 있다.


시장 선점의 가장 큰 장점은 사용자를 먼저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유저가 생기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 고프로는 이제 액션캠을 중심 축 삼는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려 한다. 고프로가 있고 고프로를 온갖 곳에 붙일 수 있는 마운트가 있으면 이제 혹시 성능이 더 뛰어난 게 있더라도 기기를 바꾸기 어려워진다. 캐논으로 DSLR 장비를 꾸리며 렌즈를 사면 점점 니콘을 살 수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기 더해 고프로는 별도의 앱까지 만들어 편안하게 동영상을 편집할 수 있도록 했다. 아이폰과 아이튠즈의 관계처럼. 재미에서 시작한 일이 액세서리-하드웨어-소프트웨어로 이어지는 견고한 성 같은 비즈니스 모델이 된 것이다.


사실 고프로에게 지금은 무척 고통스러운 시기다. 주가는 1/7 수준으로 떨어졌다. 신제품 드론 카르마는 발매를 연기했다. CEO 닉 우드맨이 직접 나서서 “우리는 괜찮아 질 거에요”라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설혹 고프로가 잘 안돼도 뭐 어때 싶은 기분이 든다. 닉 우드맨 씨의 인생은 그 자체로 꽤 괜찮은 것 아닐까. 먼로 스쿨 서핑부 초대 회장님이 서핑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전에 없던 액션캠이라는 물건을 만들고 시장을 사실상 홀로 열어젖혔다. 이 정도면 서핑부 회장도 할 만한 것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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