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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흐동오유 Jul 19. 2021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아직도 생선을 깨끗하게 발라먹는 법을 모른다.

내가 생선이나 닭의 예쁜 살 부분만 먹는 것은 할머니가 나를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다. 예쁘고 하얀 생선 살만 발라 내 밥그릇에 얹어 주셨던 할머니 손에 자란 나는 아직도 생선을 깨끗하게 발라먹는 법을 모른다.


어렸을 때 나와 아빠는 매 주말 할머니 댁에 가서 하루 밤을 자고 오곤 했다. 토요일 늦은 오후 도착하면 할머니는 계란물을 입힌 스팸, 굴비나 갈치, 참기름을 두른 명란, 고추장 찌개 등 아빠와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 밥상을 차려 주셨다. 밥을 먹고 토요일 오락 프로그램을 보며 쉬다가 부들부들 비단 요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할머니, 윗층 사는 막내 이모할머니와 함께 동네 목욕탕에 갔다. 할머니 본인은 스스로 때를 밀어도 나는 돈을 주고 때밀이 아줌마에게 때를 밀렸다. 따가운 때밀이 시간을 참고 나오면 목욕탕에서 할머니가 사주는 삼각모양 커피우유가 그렇게 시원하고 달콤했다. 때로는 할머니와 수영장에 가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60 넘은 할머니가 그렇게 수영을 잘 하셨던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아직도 어렸을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할머니었다고 얘기 했던 것을 섭섭해 한다.

수입 상가에서 일 하셨던 할머니 집에는 노란색 통에 담긴 분과 미니어처 향수들이 있었고 늘 좋은 냄새가 났다. 바가지와 세숫대야로 할머니가 나를 씻기고 나면 한국에서 파는 존슨즈 베이비 로션과 다른, 약간 투명한 수입산 핑크색 베이비 로션을 바르는 그 느낌과 냄새가 좋았다. 할머니집 냉동실에는 초콜렛을 좋아하는 오빠를 위한 대용량 스니커즈 같은 미제 초콜렛이 항상 있었고, 일요일에 집에 가는 아빠와 나의 손에 얼음처럼 딱딱한 초콜렛을 두 봉지씩 들려 보내시곤 했다. 할머니는 내가 노래하고 개그 하는것을 좋아하셨다. 이모할머니들 앞에서 노래하면 몇 천원씩 쥐어주셨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내가 어렸을 때 정선희를 보고 따라했던 콩트가 너무 웃겼다며 종종 얘기 하시곤 했다.


그러나 할머니와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크고 나서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할머니가 미울 때가 많았다. 특히 아빠가 아플 때 언성을 높이며 ‘내 아들이니 내가 알아서 한다!’며 고집 부리는 바람에 엄마와 우리 가족이 힘들었을 때는 주저 없이 내 평생에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고 얘기 할 수 있다. 내 인생 처음 알바를 하며 온몸이 녹초가 되어 들어왔을 때 등에 파스를 붙여줄 엄마가 집에 없어 서러운 마음으로 일기를 쓸 때의 그 서글픔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코로나로 인해 가족의 임종을 못 지킨다는 뉴스가 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외국에 나와 있어 어짜피 내 삶에 달라진 것도 없고, 한국에 있을 때도 자주 찾아 뵀던 것은 아니라 큰 감정의 동요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슬펐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남편과 누워서 할머니와의 추억을 얘기하며 눈물이 났고, 그 이후에도 며칠은 가만히 있다가 울컥 울컥 슬픔이 올라왔다. 원래는 일주일 넘게 기다려야 2차 백신을 맞을 수 있었는데, 혹시나 싶어 백신 센터에 가서 담당자에게 상황 설명을 하던 중 울컥 눈물이 나는 바람에 바로 백신을 맞고 예정보다 일찍 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눈물로 얻어낸 백신이다.


그래도 다행인건 할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맨날 ‘유정이 좋은 사람한테 시집 가야 하는데’ 라는 말을 달고 사셨는데, 건강한 모습으로 나, 오빠, 그리고 사촌동생 준영이가 좋은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보셔서 다행이다. 그리고 결혼 하기 전,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엄마, 오빠와 함께 할머니 댁 근처에 새로 생긴 돼지 갈비 집에 가서 같이 식사를 했는데, “지난 주 윗집 사는 동생네 자식들이 와서 새로 생긴 고깃집 가서 같이 식사 했다고 해서 부러웠는데, 덕분에 나도 와보네” 라며 유난히 싱글벙글 좋아하셨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할머니와 먹은 밥 중에 가장 뿌듯했던 식사였다.

할머니, 나, 준영이. 어렸을적 살았던 논현동 집 마당 등나무 아래에서.


돌아가신 후 이런 얘기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우리가 어디로 이사가든지 오빠가 좋아하는 오이소박이와 내가 좋아하는 밥풀 많은 식혜를 이고 지고 성치 않은 몸으로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더 반갑게 맞아드리지 못하고, 이왕이면 할머니 댁에 가서 그 짐들을 받아 오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나는 강력한 ‘오싫모(오이를 싫어하는 모임)’인데, 할머니가 해주는 오이 장아찌는 그렇게 맛있어서 가끔 입맛 없을 때 그 맛이 생각 나곤 했다. 어렸을 때 추석이면 할머니가 직접 삶아온 밤으로 만들었던 특제 밤 송편도 참 맛있었다.


외국에 나와 사는 한국 사람들과 항상 타향살이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가족 대소사에 함께 할 수 없는 점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나의 조부모 세대가 이제 모두 돌아가셨다는 점이 생각보다 이상한 기분으로 다가 왔다. 이제는 우리들이 또 자식을 낳고, 그렇게 세대교체가 되겠지. 아직은 한참 남았겠지만, 그 다음은 우리 부모님의 차례라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 졌다. 양쪽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 시간을 많이 보내고, 너무 기력이 쇠하시기 전에 한국에 자주 가자고 남편과 다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이 영국에 오셨을 때 같이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던 것은 정말 좋았다. 엄마 아빠와 여행을 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로 나에게 부담이었는데, 살뜰하게 잘 챙기는 성격 좋은 남편과 결혼한 덕분에 영국 여행도, 오스트리아도, 부산 여행도 즐겁게 다녀올 수 있어서 감사하다. 나이가 드나보다. 나에게 가족의 의미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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