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사의 죽음에 대한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 교사들은 슬픔과 동요, 좌절과 분노를 함께 표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부 언론이나 시민들은 그 슬픔과 분노를 다른 이를 향한 혐오와 응징으로 맞바꾸려고 한다. 특히 그러한 분노가 학생에 대한 체벌 부활, 학생인권조례의 폐지, 학부모의 학교출입금지 등의 주장으로 나아가고 있어 우려스럽다.
교사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있고 위법적 행위가 있었다면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학교 운영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안을 찾기보다 학생이나 학부모 전체를 혐오의 대상으로 매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각 교육 주체들은 서로에게 '타자', 즉 남이다. 그래서 낯설고, 대화의 문법이 다르다. 때문에 경계하게 되고, 서로의 생각과 문화를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인색하다. 인색함이 강화될수록 각 주체들은 만남과 대화를 회피 또는 거부하게 되고, 그 자리에 혐오와 편견이라는 벽을 쌓는다. 이러한 벽이 견고해지면 견고해질수록 오늘날 학교 붕괴를 막을 방법을 찾는 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학교가 두려운 건 교사만이 아니다
오늘의 교육 현실을 보고 있자면 모든 국민이 공감하고 동의하면서도 학교 교육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하지만 절망과 실망으로 점철된 학교 교육에서 희망의 사다리를 건져내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 교육의 실체를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는 것엔 동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엄기호의 책,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는 학교가 교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지금의 학교 현실에 대해 교사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지가 담긴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 현장의 이야기"이다. 또 이를 통해 성찰과 자각을 통해 소통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으로 다시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저자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까지 나아가진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주목받았던 것은 학교교육의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한데 있다.
<이미지 출처: 출판유통통합전산망, 도서출판 따비>
이 책은 나온 지 10년이나 된 과거(?)의 책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그때나 지금이나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책에서 언급된 학교의 상황이 그때보다 더 나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사뿐만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도 사실 학교교육에 희망을 갖지 못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사실 저자가 책 제목에 쓴 '교사도'라는 말이 이미 학교를 두려워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학생과 학부모도 두려워하는 학교를,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교사도' 그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강조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왜 교육의 주체들은 학교 교육을 두렵게 생각하게 되었는가. 학교라는 제도는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인가. 복지적 측면에서 교육 재정 상황은 분명 나아지고 있고, 학급당 학생수도 줄었으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비해 학교 운영도 민주적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교육과 학교가 붕괴되고 있다고 말한다. 학교와 학원으로 이어지는 노동으로 학생들은 학교 가는 게 무척이나 힘이 든다. 또 상당수의 학생들에게 학교는 아무런 의미 없이 가 줘야 하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학습에 대한 의미가 붕괴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교사들의 고통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학교 상황이 불만족스러운 학부모들은 점점 학교를 불신하게 되고 결국 갈등으로 이어진다.
이런 악순환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자고, 그때가 차라리 나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퇴행적인 '레트로토피아'를 주창한다. 하지만 그때가 나았다는 것은 찰나의 기억일 뿐 정말 교육 환경이나 질이 나았었던 건 아니다.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과거의 학교 교육은 지금보다 더 심하게 궁핍하였고, 비교육적, 비민주적, 비합리적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는 '학교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학교는 무엇이고, 왜 붕괴되고 있다고 하는가?
사실 학교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다. 학교는 학생들이 공부하는곳이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왜 학교 공부가 필요하고, 무엇을 위해 학교 공부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공통된 합의점이 없다. 저마다 목적하는 바와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저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학교에 가거나 보내지만 이제 더 이상 학교가 "지식 습득의 장으로서도, 계몽의 공간으로서도, 신분 상승의 도구로서도, 다양한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곳으로써의 의미도 상실"했고, "나아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 폭넓은 경험을 하는 ‘성장의 공간’, ‘삶의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하고 있다."라고 진단한다.
저자의 말대로 학교교육은 의미를 잃고 붕괴되고 있다. 교사든, 학부모든, 학생이든 동상이몽 속에 각자의 이익을 위해 학교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학교는 갈등이 상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언제든 갈등이 표면화한다고 해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다.
학부모가 바라는 학교, 교사가 생각하는 학교
학부모는 자기 '자녀'를 중심에 두고 학교와 교육을 바라본다. 그런데 교사는 '수업'과 '교육'을 중심에 두고 학생을 바라본다. 그래서 학부모와 교사가 학생을 사이에 두고 만날 때 소통하기가 쉽지 않다. 학부모는 학부모 나름대로, 교사는 교사 나름대로 서로에게 불신과 불만이 있다. "학부모는 교사에게 자녀를 설득해 줄 것을 요구"하고, "교사는 학생을 이해하도록 학부모를 설득"하고자 한다.
"교사와 부모가 만나는 공간이자 토론하는 주제는 ‘아이’다. 교사는 학부모와 이야기를 할 때는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학부모의 아이에 대해 ‘상담’ 혹은 ‘면담’을 한다고 생각한다. 학부모 역시 교사가 면담을 요청하면 자신의 아이에 대한 상담이라고 생각한다. 학부모와 교사를 묶어주는 것은 ‘아이’지 ‘교육’이 아니다. 교사와 학부모가 다 교육의 주체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대화는 모두 교육이 아닌 ‘아이’가 중심이다."
저자의 말처럼 대부분의 학부모는 '자기 자녀의 교육에 대해서만' 교사와 상담하길 희망한다. 그래서 자녀 교육을 둘러싸고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문제는 교사와 학부모 모두 이런 갈등을 개인적인 일로 치부한다는데 있다.
교사와 학부모가 교육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시작은 자녀 또는 학생 개인에 관한 것이지만 끝은 학교 교육 전반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또 교사와 학부모가 일대일로 만나면 자연스럽게 학생 개인에 대해 말하게 되지만, 교사와 학부모가 집단 대 집단으로 만나면 "학교 교육"에 대해 "공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된다
학부모회와 학교운영위원회는 이처럼 학교, 교사와 학부모 사이를 공적인 관계로 엮는 제도이다.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벌어진 갈등도 이런 공적 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소위"갑질" 문제도 이런 공적 시스템에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한국교원대 김성천 교수는 "합리적인 다수의 학부모가 학교를 휘젓는 일부 학부모를 견제하고 견인하는 흐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학부모회와 학교운영위원회와 같은 공적 제도를 강화하고 협력의 장으로 만드는 문화를 만들 수 있다면 학교와 학부모 사이의 많은 문제들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학부모의 공적 권리와 책임 - 교육시민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일부 학부모는 이런 공적 제도를 사유화하여 자기 자녀만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하면 학교와 교사는 학부모가 공적 제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 학부모의 일탈을 핑계로 학부모 전체를 매도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일부 교사의 일탈을 전체 교사의 문제로 일반화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현재의 공교육과 학교 교육 붕괴의 원인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있어 각 교육주체들에 대한 공적 권리는 보장하되 그 권리를 행사하는데 필요한 책무도 가지도록 제도적, 교육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찍부터 학교 교육을 바꾸고자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의 다양한 노력들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대안으로써 확실하게 자리 잡지는 못하였다. 무엇보다 이러한 교육개혁에 대해 민감해야 할 학생과 학부모가 충분히 설득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학생은 교사의 말에 공감하고 가르침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학부모들은 과연 공감하고 협력할 수 있겠는가. 물론 쉽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과거 자신의 학창 시절 경험이 전부인 학부모들은 과거의 향수와 영광만을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학력고사나 체벌의 부활 같은 과거 회기적인 학교교육을 요구할 수도 있다. 또 공적으로 부여된 권리를 사유화하고 이를 이용해 자기 자녀만을 위한 활동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이 학교교육 개혁을 진전시키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학교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교육을 개혁하고자 하는 학부모들도 있다. 또 그런 학부모들이 학교 교육에 함께하기 위해 학부모회든, 학교운영위원회든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아직은 적은 수이지만 '자기 자녀의 교육'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주체로서 '학교 교육'에 대해 학부모의 권리와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학부모가 있다. 한국학부모학회의 이종각교수는 그런 학부모를 '교육시민'이라 부른다. 즉, 교육시민은 교육분야의 시민적 책무와 역할을 담당하는 학부모를 말한다.
학교 공동체는 복원 가능한가?- 타자와의 만남을 시작하자
저자는 "학교가 망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어떻게 망했는지, 그 망한 폐허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폐허를 응시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그래야 그 원인을 진단하고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강도가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취향에 집착"하게 되고 끼리끼리 모이는 "사교"만 남게 된다. 그런데 교육은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때 현대는 위의 언급처럼 교육이 불가능하도록 조장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교육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자주 인용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빌리자면 "사적인 문제들이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새롭게 해석되고 사적인 곤란들에 대하여 공공의 해결책이 모색되고 조정되며 합의”되는 공적 공간을 활용하려는 교사, 학생, 학부모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한 이 공간을 활용해 학부모들은 교육주체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각성하고, 적극적으로 '교육'에 대해 말하고 있고 말하고 싶어 한다. 10년 전 저자는 학부모와 교사 사이를 비관적으로 말했지만 적어도 현재는 '교육'을 주제로 학부모와 교사가 만날 씨앗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생각들을 이상향일 뿐 현실에 적용할 수 없다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은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 당장의 문제부터 관심을 가지고 각자의 해법을 제시하고 토론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타자'와 대화와 소통을 시작해야 한다.
교사, 학생, 학부모 등 각 교육주체들은 서로를 향해 쌓은 불신의 벽을 거두어야 한다. 또한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교육시민'으로서 '타자'인 다른 교육주체들과 만남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산적한 교육 문제의 해법을 찾는 단초는 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 엄기호는 교육 관련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학자다. 그의 글들은 교육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과 울림을 준다. 그래서 여러 번 곱씹어서 읽게 된다.
저자의 활동 경험에 기반한 성찰의 결과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라는 책으로 열매를 맺었다. 학교 교육을 적나라하게 서술한 이 책은대중들에게 학교 교육 문제에 대한 공감과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오늘날 학교 교육의 문제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 책과 함께 [지그문트바우만,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 엄기호의 다른 책 [단속사회]를 함께 읽어 보기를 권한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보다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