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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정원을 내버려 두지 말자

우리가 행동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민주주의의 정원]

by 오영

민주주의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꾸는 것이다.


에릭 리우, 닉 하나우어의 [민주주의의 정원]은 미국에서 2011년 출간되었고, 공교롭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었던 2017년 한국어로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출판되었다.

책이 출판된 지 거의 15년, 우리는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을 맞으며 민주주의를 다시 외치고 있다.


<출처: 웅진지식하우스>

이 책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라는 형식만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실제 작동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시민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약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의존적인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민주주의적인 행동에서 시작된다.


비유하자면 경제와 정치의 민주주의는 형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이 잘 성장하도록 '가꾸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가꾸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정원사가 필요하다. 시민 개개인이 정원사가 되어 국가와 사회가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도록 일상에서부터 잘 가꾸어 가야 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이 책의 내용을 함축했다고 생각되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이 떠올랐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우리는 지난 2016~17년과 2024~25년에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하였다.


그래서일까.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비유의 훌륭함에 비해 내용의 공허함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국가와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시민의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미 몸소 체험했던 우리 입장에선 너무 당연한 말이었기에 책의 내용이 장황하다고 느껴졌다. 미국과 한국의 상황이 다른 점을 고려하고 생각해도 그랬다.


그런데 우리는 2017년과 다른 2025년을 맞이하고 있다. 2017년엔 대통령 개인의 부정부패에 대한 문제였다면 2025년에 우리는 국가 제도와 정치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 투쟁의 결과물이라고 여겼던 국가 제도와 정치 시스템이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영구운동기관"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장 혁신적이고 민주적이라고 일컫던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도 히틀러에 의해 무력화되었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국가라 자부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권력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국가 제도와 정치시스템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국가와 경제, 정치는 정형화된 완벽한 구조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복잡 적응시스템이며 여러 가지 변화가 조합된 엄청난 흐름"을 가진 정원이라는 [민주주의의 정원] 저자의 비유가 적절하였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정원은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경제와 시민 권력의 생태계로 나감으로써 소수가 아닌 다수에게 이익을 안기려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시민들"이 정원사가 되어 민주주의의 정원을 계속 가꾸어 나가야 한다.


"훌륭한 정원사는 절대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정원에 대해 책임을 진다." 왜냐하면 정원은 언제든지 금방 야생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가꿔야 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정원을 가꾸어야 할 그 시민들은 정말 민주주의를 가꿀 "능숙하고 생산적인 정원사"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들은 처음부터 능숙한 정원사가 되는 건 아니기에 함께 민주주의를 가꾸어보는 "경험"을 연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민정신은 우리가 상호의존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정원사가 갖춰야 할 시민의식, 시민정신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시민정신은 우리가 상호의존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민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더 큰 정원 안에 존재하는 유기체"이며 "우리는 서로를 형성"하고 "서로의 선택에 묶여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맺어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 가운데 하나는 ‘모든 행동은 잠재적으로 매우 전염성이 높다’는 점이다. 당신이 인정 많고 관대하다면 사회는 인정 많고 관대해질 수 있다. 당신이 폭력적이고 증오에 찼다면 그 사회는 폭력적이고 증오에 넘치게 된다. 당신이 바로 그러한 전염성의 근본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훌륭한 시민의식을 빠르게 퍼지도록 네트워크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약한 연결의 힘"이다. 시민의식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건 진보정당과 같은 기존의 강력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일상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동호회와 같은 소수의 약한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난 비상계엄을 저지하고 탄핵 정국을 이끈 것은 이미 조직되어 있는 강력한 단체들이 아니라 K-POP팬(조직된 팬클럽이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들과 각종 동호회 등에 참여하고 있는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시민들은 옳다고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겼고, 각자의 작은 행동들이 연결되어 신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시민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광장으로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로를 믿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뢰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접속점들에 권한을 부여한다. 신뢰는 약한 연결을 유용하게 만든다. 신뢰는 우리가 시민의식에 대한 인간적 척도를 지켜야 하는 이유다."


위정자들이 헌법을 위반하고 국민들의 신뢰를 저버렸지만 반대로 시민들은 자발적 네트워크를 통해 광장에 모여 헌법 수호에 대한 신뢰를 쌓아 올렸다. 결국 약한 연결의 힘들이 상호 "신뢰"를 통해 강력한 "공공의 손"을 만들어 국가의 방향을 이끌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취에 만족하고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정원이라는 점을 계속 상기해야 한다. 관심을 놓는 순간 야생으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가꾸고 성취한 민주주의 정원을 계속 잘 가꾸고 유지하려면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 시민들의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학교는 민주주의의 정원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국가나 정치 시스템과 같은 거대 조직이 아니라 나의 주된 관심사인 학교로 좁혀 분석해 보면 어떨까. 과연 학교는 민주주의의 정원이 될 수 있을까.


찾아보니 이런 문제의식이 반영된 연구보고서가 이미 나와 있었다. [민주주의 정원으로서의 학교 실현 방안](백병부외, 2021)은 학교를 민주주의의 정원에 비유함을 통해 최소주의적 학교민주주의의 허약함을 비판하고 확장된 민주주의 정원으로 학교 민주주의를 제안하고 있다.


여기서는 글에 필요한 부분만 발췌했으므로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연구보고서를 직접 읽어보았으면 한다.

https://www.gie.re.kr/publication/stdreportDetail.do?id=141089119&subject=&research_classification=&srch_input=%EB%AF%BC%EC%A3%BC%EC%A3%BC%EC%9D%98%EC%9D%98+%EC%A0%95%EC%9B%90&scType=&scType2=mtab1&scType3=&currRow=1


보고서는 교육 주체로서 학교를 가꾸는 정원사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학부모는 학교운영에 참여가 제한적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학생들은"자기 결정권을 가진 교육의 주체로 어른들과 함께 정원을 가꾸어 나가는 정원사라기보다는 여전히 보호받고 가꾸어야 할 대상 즉 식물로 간주되고 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학교가 민주주의 정원이 되기 위해서는 학교구성원 간 동등한 권한이 보장되어야 하며, 교직원회, 학부모회, 학생회 등 각 자치기구별 운영을 보장하되 "고유권한"과 "공동권한"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의사결정 시스템으로서 학교운영위원회가 역할할 수 있도록 위상과 역할을 수정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현재는 이러한 민주적 의사결정제도가 최소한으로 구축되어 있지만 형식적 민주주의나 엘리트주의에 입각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소수에 의한 의사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한 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학교민주주의 없는 학교자치는 법적으로 학교에 대한 통할권을 부여받은 학교장 자치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크며, 학교자치 없는 학교민주주의는 위에서 하달받은 것을 민주적인 것으로 포장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학교 자치는 학교민주주의가 실행되기 위한 조건이며, 학교민주주의는 학교자치의 방법과 목표를 결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백병부 외, 2019:5)."


또, 학생, 학부모에 비해 교원들은 학교민주주의의 진전에 소극적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학생이나 학부모의 입장보다는 교원의 입장에서, 최대주의적 관점보다는 최소주의적 관점에서, 지난한 숙의의 과정보다는 효율성과 형평성을 갖춘 업무 처리의 수단으로 학교민주주의를 사고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책당국의 역할을 주문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정책은 민주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책당국은 학교의 맥락에 맞는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도록 지원하되 이를 네트워킹해야 하며, 다양한 학교민주주의의 실험이 가능하도록 지원하되 이를 네트워킹해야 하며, 다양한 학교민주주의 실험이 공유될 수 있는 플랫폼이 되어야 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실험 사례를 발굴하고 이 사례의 성공과 학산을 위해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엘빈토플러는 변화의 속도가 가장 느린 조직으로 법과 정치조직과 더불어 학교를 꼽았다. 그만큼 학교를 변화시키는 일은 더딜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학교 민주주의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고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정원] 저자들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관심을 놓는 순간 학교라는 정원은 언제든지 야생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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