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응보를 바라는게 당연하다
정말 싫은 사람이 있다. 정말 미운 사람이 있다.
전생에 나랑 무슨 인연이었기에 이토록 무지막지 유독 나만 괴롭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억울한 건, 그 미운 놈에게 딱히 어찌하지도 못한다. 아마 그래서 더 미운 것일 테지만.
그게 보통의 우리들이다.
누군가 나를 화나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억울하게 했다고 해서 모범택시(최근 종영한 드라마)의 복수 대행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없다.
아니,
복수라는 거창한 계획은커녕, 당장에 그놈을 찾아가 면전에서 시원-하게 욕을 해줄 기회도 선뜻 잡지 못한다. 대게는 혼자 들숨 날숨을 몰아 쉬면서 친한 친구의 카톡 방에 잔뜩 화가 나 보이는 이모티콘을 투척하며 나의 분노에 공감해 주길 바라는 게 고작이다.
그게 보통의 우리들이다.
세월과 부딪힌 만큼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도 늘어난다.
부도덕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 억울한 일을 덮어 씌우려는 사람, 세상에 대한 불만이란 불만은 다 내게 쏟아 내는 사람, 응원보다는 핀잔으로 내 자존감을 와장창 깨뜨리는 사람. 그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내 맘 속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그런데 조금 더 살아보니 다행히도 인과응보란 말이 허투루 생긴 건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내 시간 중 일부를 훼손하고,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들을 그때의 나는 어찌할 수 없었고, 그냥 울었지만.
살아갈수록 그들의 본성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드러나고, 그들도 비슷한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내가 울었던 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근사치의 값을 치른다.
인간의 고통은 품앗이이거나 돌려막기인가?
용서가 미덕이라고, 남의 불행을 좋아하면 안 된다고, 공자나 예수 같은 말들을 해대지만,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 그리 살 수 없다.
원론적으로 말하는 건 쉽지만,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나 자신의 일에는
누구도 섣불리 도덕책 같은 말은 하지 말라.
그것이 보통의 우리들이다.
어딘가에서 상처 받고 혼자 아파하고 울고 있을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위로가 있다.
시간을 믿어 보라.
당신을 울게 한 그들에게도 매우 구체적인 불행의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그때 당신도 구체적인 위로를 받을 것이다.
상처 한켠이 조금 사그라들고, 미움 하나가 연민이 되고, 분노 한 줌이 식으면서
‘인과응보야.'라는 달콤 쌉쌀한 통쾌함도 있을 것이다.
공자와 예수는 질책할지 몰라도,
보통의 우리에게 그것은 분명한 위로가 될 것이다.
짧게 말하면,
보통의 우리들이 보통의 삶을 조용히 살다 보면
그 녀석도 한 방 먹는 날이 온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