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피 말리고 간당간당한 소르본 수업

문학, 미술, 고고학으로 만든 완벽한 좌절 레시피

by 삐빕




하얀 도화지에 그려진 첫 학기

아무것도 모르는 하얗고 무지한 첫 학기.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특히 날 힘들게 했던 세 가지 과목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과목이 괜찮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단 대학 수업의 시스템을 좀 설명하자면, 우리 학교의 미술사학과 수업은 ‘강당 수업 (CM: cours magistral)’과 ‘교실 소규모 수업 (TD: travaux dirigés)’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같은 과목인데도 두 가지 종류의 수업에 모두 참여해야 했다. CM에서는 기본적인 지식을 교수님이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식이고, 교실 수업에서는 20-25명의 학생이 한 반으로 구성되어 발표와 과제 등을 수행했다.


처음 만나는 프랑스 대학의 세계

CM에서 배운 지식을 공부해서 마지막에 기말고사(l’examen final)에서 서술형 시험으로 치러진다. TD에서는 중간고사 개념인 le partiel이 있고, les contrôles continus라고 하는 중간 수행평가 식의 과제나 발표가 있다. 최종 점수는 이 모든 것이 합산되어 20점 만점의 숫자로 나오는데, 10점을 넘지 못하면 그 수업은 통과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 ‘반타작만 하면 되잖아? 쉽네!’라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프랑스는 점수를 굉장히 짜게 준다. 물론 이것도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름이 좀 있는 학교의 경우 교수님들이 점수를 주는 것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주는 것처럼 여긴다. 10점 이상의 점수를 단계적으로 나눈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10-12점: 교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이번엔 봐준다" 하며 건넨 구원의 손길

13-14점: 무난한 통과. "노력은 인정해. 괜찮아, 잘했어!"라는 느낌

14-16점: 여기서부터는 교수님이 슬슬 고개를 끄덕이며, "오, 괜찮네? 꽤 잘했잖아!"라고 말하는 단계

16-18점: "훌륭하다!" 교수님의 진심 어린 박수. 당신은 교수님의 마음속에서 이미 반짝이는 별이 되었을 것.

18-20점: 전설의 점수, 신화 속의 존재. 이 점수를 받으면 '쟤는 박사까지 하겠구나.' 이미 확신할 수 있다.


첫 번째 시련: '롤랑의 노래'보다 더 힘든 문학 수업

나에게 힘듦을 안겨준 첫 번째 수업은 바로 문학이다. 1학년은 무조건 들어야 하는 필수 교양이었고, 엄청난 필기체를 구사하는 열정이 넘치는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첫 시간부터 중세 문학인 ‘롤랑의 노래 (Chanson de Roland)’라는 작품을 배웠는데, 배경을 설명하는 초반에 이미 나는 넉다운이 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번역본도 없었고, 자료가 많지 않았다. 중간중간 내주는 숙제 때문에 불문학을 전공한 친구에게 공부한 자료가 있냐고 물어봤더니 ‘그걸 프랑스어로 배워?’라고 되물어보았다. 교수님은 300명이나 되는 신입생 이름을 매 해 다 외울 정도로 엄청난 분이었고 나는 그분의 캐릭터도 수업도 너무 버거웠다.


두 번째 고난: 유명작품은 휴가 중, 과제는 풀타임

두 번째 고난의 과목은 전공 중 하나인 19세기 미술이었다.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첫 시간부터 과제가 쏟아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일단 미술사 과목은 무조건 발표(exposé)가 있다. 첫 수업과 두 번째 수업까지는 담당 교수가 오리엔테이션과 발표 하나를 모델로 보여준다. 그리고 세 번째 시간부터는 학생들이 각자 맡은 작품을 준비해서 발표하는 식이다. 재미있는 건, 절대 유명한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 만약 모두가 알고 있는 예술가라고 해도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만 발표 리스트에 선정되어 있다. 직접적으로 다룬 자료도 별로 없는 그런 작품들. 어떻게 준비하냐 하면 결국 그 비슷한 시기의 작품들의 분석을 보고 직접 그 문제의 작품을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이야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이해하고 있지만, 당시엔 정말 암담했다.


마지막 관문: '채점이 불가능한' 프랑스어

마지막으로 그리스 고고학•미술사 과목이 고난의 종착지였다. 오히려 고고학 과목은 발표도 없고 수업 분위기도 미술사 과목보다 밝았다. 나름 가벼운 마음으로 출석도 잘하고 수업을 따라가고 있는데, 첫 시험이 문제였다. 다섯 번째 수업에서 중간고사 겸 시험을 보았다. 프랑스에서 처음 보는 시험이고 형식도 모르는 상태라 사실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잘 몰랐다. 수업동안 받은 프린트물을 열심히 보고 이해하려 애썼는데도 불구하고, 당일에 시험지를 받고서는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디테일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여태 본 쪽지시험들보다 훨씬 더 세세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마지막 문제는 서술형이어서 나름 열심히 작성했다. 그런데 그다음 시간에 돌려받은 채점된 시험지에는 20점 만점의 5점이라는 숫자와 더불어, '너의 프랑스어를 알아보기 어려워서 채점할 수가 없다.'라고 쓰여있었다. 수업이 어려운 것도 물론이지만, 이 문장이 정말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입학 약 한 달 반 만에 모든 자신감과 의지를 잃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수업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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