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새 학기 결심은 현관문 밖에 두고 왔습니다.

2학기는 다시 마음 잡고 해 보자. 근데 상황이 안 도와주네?

by 삐빕




대학 수업에서의 긴장의 연속, 좌절의 시작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아니, 뭐 중간고사 한 과목 망친 거 가지고 학교를 안 가?’ 하지만 당시 나에게 그 상황은 ‘시험 하나 망친’ 수준이 아니었다. 개강하고 첫 한 달 반즈음의 시간 동안 나는 혹시나 교수님이 말을 걸까 봐 잔뜩 경계 레이더가 켜져 있었다. 돌아가면서 뭘 시킬까 봐, 혹은 나에 대해 수업 외적인 어떤 뭔가 물어볼까 봐. 주변 모든 이가 미리 예고했던 대로, 수업은 하나도 들리는 게 없었다. 듣기 시험에 나오는 아나운서가 아닌 교수님들은 발음과 말투가 각각 천차만별이었고, 어투에 따라 돌려 말하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 교수님 말은 아예 주제 파악도 못 할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수업 외적인 일상적인 질문이라도 나에게 던져졌을 때, 20명 남짓의 다른 학생들 앞에서 혹시 그 간단한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바보로 보일까 봐 너무 무서웠다. ‘쟤는 저 말도 못 알아듣는데 수업은 어떻게 듣고 있는 거야?’라는 당연한 질문을 그들의 머리가 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면서 수업에 와서 앉아있는 나는 나의 그 상태 자체가 가장 들키기 싫어서 필사적이었다.


파리 13구의 히키코모리 탄생

그런 내가 같은 반 수업을 듣는 애들한테 수업 필기를 빌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떻게든 복습은 해야 했으니까 나는 수업을 녹음해서 다시 듣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1시간 30분짜리 수업의 녹음은 10시간을 붙잡아도 들리지 않았다. 배운 내용을 인터넷에도 찾아봤지만 수업에서 배운 것만큼의 디테일한 정보를 찾기 어려웠다. 학기 첫 시간에 교수님이 알려주신 관련 참고 도서를 찾아보았다. 이젠 범위가 너무 방대했다. 한 챕터라도 한 학기 안에 읽을 수 있으면 다행인 정도였다.


결국 수업이 핵심이었다. 그 많은 내용을 다 요약해서 전문가가 앞에서 설명해 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당연히 제일 빠른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 중요성을 알고는 있지만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을 어쩌겠나! 어쨌든 그 그리스 고고학•미술사 시험은 나름대로 어떻게든 고군분투한 결과였다. 그냥 점수가 낮은 것뿐 아니라 ‘채점할 수 없는 너의 프랑스어’라는 코멘트가 너무 자존감을 부수어버렸다. 그렇다고 그 교수님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 교수님의 수업을 좋아했고, 내가 나중에 몇 년이나 지나서 그 시험지를 다시 확인해 보니 그 교수님은 나에게 어떻게든 점수를 주려고 노력하셨던 게 보였다. 그저 당시의 나는 애초에 실낱같은 ‘학교에 대한 의무감’이라는 끈을 간당간당하게 부여잡고 있었고, 시험 결과로 그 얇디얇은 끈이 똑 끊어져버린 모양새인 것이다.


공감받지 못한 우울증

그 기점으로 학교 수업에는 더 이상 나가지 않았고 집에 콕 박혀있었다. 집 안이 더러워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정리는 하며 살았는데 애초에 크게 어지르지도 않았다. 외출은 가끔 먹을 것을 사러 장 보러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 많이 남아있지 않다. 뭘 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뭘 봤는지 기억이 거의 없다. 아무래도 뇌가 지워버린 것 같다.


어쩌다 강당 수업에 한 번씩 갔었는데 같은 시기에 입학한 동기인 한국인 언니가 한국에서 약사를 하다가 진로를 바꾸고 싶어서 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우울증인지 의심을 시작할 때라 언니한테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의료계에 있던 사람이라 그런 얘기를 가볍지 않게 꺼냈었다. 그런데 ‘우리 다 힘들어, 너만 왜 유난이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인생 최악의 대답이었다. 주변에 심적으로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같이 리옹에서 올라온 친구들도 다들 자신의 삶을 살기에 바빴다.


새 학기, 새 마음... 그리고 새로 바꾼 현관문

그렇게 2학기가 되었고 조금은 기운을 내서 다시 수업에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개강 첫 주, 오후 수업 전에 오전에 집 청소를 하면서 쓰레기를 버리러 집 문 밖으로 나왔는데 내가 열쇠를 챙기지 않고 습관적으로 문을 그냥 닫아버렸다. 그대로 문은 잠겼다. 나는 지갑도, 핸드폰도 없었다. 경비실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열쇠공에게 연락을 했지만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근처 열쇠공 주소를 찾아서 그 주소만 받아 적고 그대로 나가서 그 주소를 찾아 걸어갔다. 2학기가 시작하는 시점이니 1월이고 아직 추웠다. 나는 외투도 없이 30분을 걸어 찾아가 수리를 요청했다. 집 문을 열려면 자물쇠 장치를 아예 부수고 다시 설치해야 했다. 나는 슬리퍼 차림으로 밤 9시까지 문이 수리되는 걸 그저 기다렸다. 겨우 고쳐지고 나서 100만 원을 결제했다. 지쳐서 눈물도 안 나왔다. 일이 안 풀리려니까 이렇게 모든 게 다 꼬이는구나. 그날 수업은 제일 엄했던 문학 교수님의 TD 교실 수업이었다. 첫 수업을 못 나갔는데 1학기에 하도 못 나간다고 메일을 보냈던지라 또 메일을 보내기가 민망했다. 그때 다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약간 고개를 든 의지의 싹은 그렇게 툭 꺾여버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매일이 피 말리고 간당간당한 소르본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