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하고 의미 없이 살아가는 날들의 연속
앞서 한번 언급했듯이 나는 그 시기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동기서를 쓰고 학교를 준비했을 때부터 조금씩 나를 갉아오던 무력함은 결국 1학기 중반부터 점점 심해지더니 2학기부터는 모든 일상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의지를 할 수 있었던 제일 친했던 친구는 파리에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었는지 모임에도 활발히 나가고 자신이 어떻게 즐겁게 지내는지 전시했다. 그런데 본인 자체는 우울하다고 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고 기대고 싶지도 않았다. 리옹에서 올라온 다른 친구들과도 서로의 힘듦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학교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고 함께 시간을 따로 내서 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원래 좋아하던 텍스트를 읽는 거나 루틴들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아무것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 안에는 좋아하던 '하이큐'라는 애니메이션을 계속 틀어두었다. 소음이 조금 있었으면 좋겠는데 음악은 싫었다. 틀어놓고 멍하게 누워있다가 잠깐씩 화면 보고, 인터넷이나 하고 그랬던 것 같다. 뉴스 같은 사회 이슈는 버거웠다. 그때 트위터로 파리에 유학하고 있는 사람들을 팔로우하면서 정보도 얻고 그랬었는데, 그들이 한국이나 프랑스의 이슈에 대해 찬반 토론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너무 갑갑했다. 그래서 다 끊어버리고 실제로 알고 있는 친구들의 계정만 남겨두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나는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는 못했다. 그냥 학교에 가기가 힘들고 싫고 그 사실을 회피하면서 내 일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외출은 안 하지만 그래도 집에선 정리도 하고 씻기도 하고, 내가 익숙하게 미디어로 봐왔던 ‘우울증 환자’랑은 스스로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인터넷을 하면서 놀다가 성인 ADHD 테스트라는 걸 발견했다. '요새 무언가에 집중하기는 힘들었지'라고 생각하면서 유료 테스트를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ADHD가 맞다는 결과가 나왔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주의력이 없고 산만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 좀 당황스러웠다.
엄마랑 가끔 통화를 하면 아빠가 일하기 너무 힘들어하신다는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다 접고 들어가는 게 맞나? 여기에 있으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 그럼 내 존재가 없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계속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쌓여가고 나를 짓눌렀다. 가장 극단적으로 자존감이 떨어졌을 때는, '여기서 내가 이렇게 생을 마감하면 어떻게 될까?'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날 붙잡은 생각은 '우리 엄마아빠가 아직 한 번도 유럽 여행을 온 적이 없는데, 그 처음을 딸의 시체를 정리하러 오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2016년 후반부터 2017년 초반까지를 돌이켜봤을 때 기억하는 건 이 몇 가지가 전부이다. 그 외에는 없다. 그야말로 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나의 지금까지 인생에 가장 회색이었던 1년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그렇게나 활달하고 밝았던 성격이었는데 내 인생에 이런 우울감을 갖게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경험으로 이제 자신의 우울감을 극복하는 어느 정도의 방법은 터득했다. 심적으로도 가장 힘들고 자존감도 바닥을 찍은 시기였지만 그래도 그 기간이 몇 년씩이나 길게 지속되지는 않았고, 앞으로의 인생까지 통틀어보아도 굉장히 짧은 기간일 것이다. 없었어도 좋았겠지만 지금은 결국 그것 또한 나를 더 알게 된 시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힘든 시간에 대한 자기 합리화가 90%쯤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