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하나에 걸린 프랑스 첫 거주지의 선택
관련 행정을 도와주는 유학원에서는 사투리를 쓰는 남부 지역을 하한 경계선으로 두고, 그 아래의 도시로는 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라거나, 사람을 만나기 좋다는, 혹은 연계된 대학이 있어서 교류가 수월하다는 여러 기준을 등한시하고 단 하나의 기준을 골랐다. 기숙사 방 안에 화장실이 있을 것. 유럽의 화장실을 가본 적은 없었다. 단지 공용 화장실과 공용 욕실은 내가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추려진 세 개의 도시. 나머지 두 곳은 어디였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세 개 중에서는 날씨가 괜찮은 곳, 대학 부설 어학원이라 커리큘럼이 괜찮은 곳이라는 기준으로 걸러낸 것 같다. 그렇게 짧은 필터의 시간을 거쳐 선정된 곳이, 바로 '생테티엔(Saint-Étienne)'이다. 프랑스인에게 이 도시에서 어학 한 일을 얘기하면 다들 놀란다. '거기 뭐가 있다고 거기를 가?', '대체 거길 왜 선택했어?' 당황이 짙게 묻은 질문들에 내가 그저 ‘그러게.’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이 도시는 우리가 흔히 미디어에서 본 낭만적인 프랑스 도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 탄광 산업이 부흥했던 곳이라서 집값이 낮았다. 그 이유로 프랑스 내에서 아랍인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그리고 그 문제의 ‘화장실이 방 안에 있는' 기숙사는 그 도시에서도 아랍인들이 모여사는 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타깃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같이 어학 하는 여자 친구들이 길에서 성희롱, 성추행을 당했다는 얘기가 하나, 둘 들려왔다. 같은 반의 한 언니는 아이패드를 들고 길을 걸어가다가 그대로 강탈당했다고 했다. 심지어 혼자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삭막한 도시가 더욱 차가웠다.
물론 나도 ‘니하오' 소리를 귀에 인이 박히게 들었다. 모르는 사람은 ‘왜, 뭐가 어때서? 인사하는 거잖아. 서양애들은 동양인 얼굴로 나라 구별을 못해서 그래.’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내 국적을 구분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반가워서 그런 인사말을 건네는 게 아니다. 명백한 캣콜링에 인종차별이다. 이 ‘니하오'는 동양인 남성이나 유모차를 끌고 가는 동양인 여성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 그 반증이다. 뒤에서 달려와 내 면전에 욕을 하고 지나가는 남자도 있었다. 점점 방 밖에 나가기가 무서웠다. 문을 열고 기숙사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쳐 인사하는 것조차 싫었다. 같은 기숙사 건물에 있는 미국 애들이 마약을 거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누가 새벽에 장난으로 누른 화재 경보 때문에 자다 말고 7층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해외에서의 삶은 이렇게 피곤함으로 얼룩져갔다.
두 학기의 어학연수를 마무리 짓는 시점. 다른 친구들이 귀국 전 유럽 주변 국들을 쭉 여행하러 가든 말든, 나는 어학 수료증이 나오자마자 그 길로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놈의 생테티엔, 이놈의 프랑스. 다신 만나지 말자.
요즘도 생각한다. 첫 도시가 생테티엔이 아니었다면 그때 그냥 학교를 바로 지원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2년 정도는 내 유학 여정을 단축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한참이 지나 들려온 소식은 ‘이제 한국인 어학연수로 생테티엔 안 보낸대'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곳에서 어학 하던 어떤 한국인 여학생이 성폭행을 당하고 나서 이제 금지 구역으로 지정된 듯했다. ‘그래, 거기 위험하다니까. 진작 막았어야 해.’ 마음에 소리가 일었다.
험한 곳에서 시작을 했다 보니 타국에 같은 처지 어학생들끼리는 꽤나 끈끈해졌던 것 같다. 매일 저녁 한국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같이 저녁을 만들어먹었다. 나는 한국에서 생테티엔으로 같이 간 친구가 있었던지라 그 친구 하나면 외롭지 않기에는 충분했다. 굳이 거기서도 다른 한국인과 친해지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떤 계기들로 어학 중반부터는 다른 한국인 무리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거친 환경에서 힘들게 살아서 그런 걸까? 그때 같이 생테티엔에 있었던 친구들은 나름 프랑스에 자리를 잡고 오랫동안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도시로부터 단련을 받아 벼려진 건가 싶기도 하다.
돈독한 한국인들과 더불어 그 삭막한 생테티엔에도 들꽃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학교 근처 쇼핑센터 앞에 있는 빵집의 직원 언니가 생각난다. 그 가게는 내가 쇼핑센터 안의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에 가는 길에 바게트를 사러 종종 들르는 곳이었다. 어학 초기에 간식을 좀 사러 친구와 함께 들러 에클레어, 타르트 같은 디저트 몇 개를 고르려 했다. 직원 언니는 여러 사이즈의 포장 박스 중 적절한 것을 꺼내려고 우리에게 ‘총 몇 개 살 거야?’라고 물어봤다. 당시 나와 내 친구는 기껏해야 ‘안녕(bonjour)’과 ‘고마워(merci)’정도밖에 몰랐다. 그런 고급 표현을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여러 번의 동일한 질문에도 얼굴에 잔뜩 물음표를 띄운 동양인 여자 둘에게 그 직원은 됐다는 듯이 그냥 작은 상자 3개에 우리가 고르는 작은 케이크들을 나누어 포장하고 건네주었다.
그리고 두 달 정도 흘렀을까? 다시 들른 그 빵집에서 또 같은 상황이 생겼다. 그때는 그 직원의 말이 들렸다. 친구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어서 내가 ‘너 몇 개 고를 거냐고.’하고 말해주었다. 나는 친구에게 한국어로 말했는데 그 직원 언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했는지, 나에게 박수와 함께 ‘브라보’를 외쳤다. 그리고 우리는 길에서 마주치면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 외에도 나의 일상에 즐거움을 더해주었던 존재들, 어학원 같은 반의 외국인 친구들도 많다. 오전 어학 수업을 마치고 늘 대학교 학생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대체 안 되는 불어로 서로 무슨 얘기를 매일 재미나게 했을까? 지금 다시 그때를 비디오처럼 틀어보고 싶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어학 중간에 두 손 두 발 들고 포기를 외쳤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