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미술사, 그리고 나의 단순하고 직감적인 선택
해외에서 사는 게 꿈이고 목표였던 어린이는 그 미래에 걸맞은 직업을 물색했다. '그래, 외교관이 좋겠어.' 외교관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로 초등학생 시절의 꿈은 그렇게 ‘외교관’이라는 단어와 함께 커졌다.
고등학교는 지역에서 꽤 수준이 있다고 평가받는 인문계 학교로 진학했다. '공부 잘하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고 싶었다. 그래봤자 일반고였는데도 나랑 수준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 친한 친구가 수학 영재 자격증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조금씩 공부에 뒤쳐져갔다. 출발선부터 다르다는 느낌, 그들을 따라갈 의지가 전혀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가면 중학교 때 등수의 두 배가 된다고 들었다. 우리 학교는 세 배였다. 실제로 겪으니 더욱 의지가 꺾였다. 3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가진 사립학교였다. 내 모교의 선생님들은 그 기간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었고,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 굳이 끌고 나가려 애쓰기엔 그들은 연차가 너무 높았다. 되고 싶은 장래희망은 있었지만 현재는 열심히 살지 않아도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 자만이 있었다.
성적에 맞춰 아무 대학이나 지원했고, 결과는 모두 탈락. 문과였기 때문에 인문계열의 학과들을 지원했지만 어떤 뜻이 있던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친구가 쓴 전문대의 산업디자인과 추가 모집 공고를 보고 그냥 따라 지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 학년의 새 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곳은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학교 수업을 열심히 따라간 친구들이 축하받으며 진학하는 학교였다. 나는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도면을 그리는 것도, 캐드 작업을 하는 것도, 3D 프로그램을 다루는 것도 별로였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하기 싫은 것도 진득하니 우직하게 하는 법도 좀 배웠어야 했다. 실기에서 점수가 딱히 나지 않는 내가 그나마 잘 해낸 건 리포트 작성이었다.
자기만의 디자인을 하려면 인풋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교수님이 계셨다.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쌓으라고 하셨다. 그 교수님의 수업에서는 언제나 뮤지컬, 연극 같은 공연과 각종 전시를 보고 몇 개의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이 과제로 나왔다. 분량 제한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한 장을 대충 써서 낼 때, 나는 열 장을 써서 제출했다. 다들 그 정도 쓸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해 버려서 내 과제는 이후로도 10장 이하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 교수님은 나를 무척 예뻐하셨다. 결과적으로 이 과목은 나에게 다른 길을 제시해 주는 결과를 낳았다.
과제를 하려고 서울시립미술관의 앤디워홀 전을 방문했을 때였다.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이곳에서 찾아왔다. 한 공간에서 다음 공간으로 넘어가는 순간, 워홀의 어떤 작품이 그 공간 전체에 확장되도록 한 연출을 보았다. 그때 깨달았다. '전시란 이런 거구나.', '주제와 작품을 관객이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거구나.' 단번에 이 작업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전시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전시 하나가 시작될 때 하는 오프닝 파티에 대한 갈망, 그리고 큐레이터가 왠지 ‘멋진 직업’이라는 이미지도 한몫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제 ‘졸업만 빨리 하고 유학 가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하고 있던 공부는 그래도 어떻게든 마무리를 하고 가자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졸업이 몇 달 남지 않은 시기였다.
'전시기획을 하려면 뭘 전공해야 하지?' 처음에는 미학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은 독일이 최고라는데? 그럼 독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좀 더 인터넷을 뒤져보니, 큐레이터가 되려면 미술사를 전공해야 된단다. (사실 둘 다 상관없다.) 미술사는 프랑스가 제일 좋고 유명하다는 의견도 곧바로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그래, 그럼 프랑스로 갈래.
제일 유명한 곳에서 공부할래. 공부 잘하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은 학생의 생각은 성인이 되어서도 멀리 가지 않았다. 참으로 단순하고 걱정 없는 유학지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자 새로운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