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업용 부동산 업계에서 인턴이나 주니어의 하루는 참 명확했습니다. 아침부터 등기부등본 열람하고, 공적장부 확인하고, 물건 정보를 표로 정리하고, 또 임대료나 거래 사례, 입지 정보를 모아 보고서나 리포트 초안을 만드는 일들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이걸 보고 "단순 노동 아니냐"고 쉽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지루한 반복이야말로 상업용 부동산 업계에 들어온 사람이 기초 체력을 쌓는 기본기와 같은 업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수없이 많은 부동산 데이터와 문서가 플랫폼으로 착착 모이고, 요약과 정리가 AI로 자동화되면서 예전엔 사람 손이 꼭 필요했던 업무들이 클릭 몇 번이면 끝납니다. 일이 쉬워진 만큼 회사 입장에선 더 적은 인력으로도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AI로 자동화 되고 편해지는 이 변화가, 동시에 우리 주니어들이 성장할 수 있는 ‘입구’를 좁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AI가 가장 먼저 대체하는 건 ‘기초 조사와 정리’
AI가 대체할 가능성이 높은 일들은 대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반복적이고 규칙이 있고, 문서나 데이터 기반이며, 결과물이 ‘정리’의 형태로 끝나는 업무들입니다. 이것을 상업용 부동산 현장에 대입해 보면 다음의 영역들이 아주 빠르게 자동화되고 있습니다.
자료 조사: 권리관계, 공적장부, 용도지역, 기본 입지·상권 정보 확인
데이터 정리: 엑셀 입력, 표준화, 중복 제거, 비교표 작성
문서 요약: 등기부등본, 부동산 공문서, 시장 리포트 요약 및 핵심 포인트 추출
리스트업: 후보 물건 리스트 생성, 조건 필터링, 기초 메모 작성
예전에는 사람이 해야만 한다고 하기보다 사람이 가장 경제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주니어와 인턴에게 배정되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월 구독형 AI 도구들이 대중화되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단돈 몇 만 원으로도 이런 일들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처음부터 가르치면서 관리와 피드백이 필요한 인턴을 뽑는 것보다 도구를 쓰는 편이 훨씬 간단해 보이는 순간이 늘어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업용 부동산은 ‘정보의 데이터화’가 유독 빠른 시장
이 변화가 상업용 부동산 업계에서 더 강하게 체감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원래 상업용 부동산의 경쟁력은 정보 비대칭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고, 그 정보는 사람 손을 타고 흘렀습니다. 그런데 최근 디스코나 부동산플래닛 같은 서비스들이 나오면서 부동산 시장 정보가 빠르게 구조화되고 공개되는 흐름이 강해졌습니다. 이제는 “누가 더 오래 발품을 팔았느냐”보다 “누가 더 빨리 정보를 읽고 조합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하는 순간이 많아졌습니다.
과거에는 인턴이 등기부등본을 열람하고 필요한 항목을 직접 기입하며 자료를 꾸역꾸역 쌓아 올렸습니다. 그 작업이 느리고 번거로웠던 만큼,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용어를 익히고 리스크를 읽는 감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불편함’이 기술로 대체되었습니다. 편리함이 생산성은 높였지만, 동시에 학습의 기회는 줄어든 셈입니다.
진짜 위협은 “일자리 감소”보다 “성장 사다리의 붕괴”
AI 시대의 핵심 문제는 단순히 “사람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게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고민은, 상업용 부동산에서 주니어가 실무를 배우는 방식이 대개 ‘단순 업무 → 반복 경험 → 기본기 → 현장 감각 → 협상·제안 능력 향상’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데, 그 사다리의 첫 칸이 통째로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턴은 원래 단순한 업무를 하면서 회사의 흐름을 배우고, 선배의 판단 기준을 옆에서 보고, 용어와 리스크를 몸으로 익혔습니다. 그런데 그 업무 자체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회사는 인턴을 쓸 일이 줄어듭니다.
주니어는 부동산 업무를 연습할 장이 줄어듭니다.
취준생은 부동산 업계로의 입장권을 얻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결과적으로 시장에 들어오는 사람은 줄어들고, 들어오더라도 기초가 약한 상태로 현장에 던져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빠르게 데이터는 정리할 수 있지만 그만큼 지식을 체득하는 능력은 감퇴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AI가 만든 변화의 그림자: 우리가 마주할 5가지 숙제
AI는 분명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지만, 그 이면에는 앞으로 부동산 업계 차원에서 감당해야 할 구조적 변화가 따라옵니다.
1. 채용 부담은 줄어도, 세대 연결과 네트워크가 끊길 수 있습니다.
주니어는 단순히 일손이 아니라 부동산 업계의 다음 세대입니다. 이들이 줄어들면 관계망과 경험의 전승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시간이 만들어주는 노하우’를 가진 인재가 더 부족해집니다.
부동산은 데이터 너머의 리스크를 판단하고 사람 간의 관계를 읽어내는 감각이 중요한데, 이건 시간이 쌓여야 생기는 겁니다. 그 시간을 쌓을 주니어가 줄면 결국 노하우를 가진 인재는 더 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3. 대면 상담과 관계 기반의 협상이 더 중요해집니다.
AI가 정보를 평준화할수록, 정보 자체보다 누가 어떻게 협의하고 마음을 움직이느냐가 더 큰 차별점이 됩니다. 숙련된 경험이 더 많고 관계를 더 탄탄하게 구축한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잡게 됩니다.
4. 수집·정리는 쉬워지고, 창의적 제안과 판단 능력은 더 커집니다.
이제는 정보를 모으는 능력보다 정보를 해석해 전략을 설계하는 능력이 핵심입니다. 때로는 너무 많은 정보로 인해 시의적절한 판단을 내리는데 혼선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5. 기초를 다질 기회가 박탈되며 전문성이 얕아질 위험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때문에 전화번호를 안 외우게 된 것처럼, 도구가 대신해주면서 사람의 내재화된 지식과 감각은 약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AI에 의존하게 되면서 본질적인 능력이 약화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면 되지 않나?”라는 질문에 대하여
물론 맞는 말입니다. AI 덕분에 생산성이 올라갔으니 더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주니어는 어떻게 그 고부가가치 업무로 이동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특히, 상업용 부동산 업계에 요구하는 전문적인 업무는 갑자기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초를 반복하며 기준을 배우고, 실수하며 교정받는 과정이 필수입니다. 그 초기 단계가 사라질 때 사람은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단순히 기술의 발전의 문제가 아니라, 인력 양성을 위한 육성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마무리하며
우리 상업용 부동산 업계는 원래도 직무 교육 제도가 탄탄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부동산 지식이라는 것이 다양한 분야와 연결된 것이 많아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에 체계화하여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취업하고도 사설 교육을 찾거나 각자 고군분투하며 배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AI로 인해 주니어들의 학습 기회까지 줄어들면 이 약점이 더 크게 드러날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해 보입니다.
1. 협회와 기관 중심의 실무 교육 강화: 현업에서 쓰는 간단한 용어에서 부터 경험이 필요한 제안서나 보고서 작성까지, 현장에서 바로 쓰는 표준화된 커리큘럼이 절실합니다. 이를 부동산 관련 협회나 기관 등에서 체계화시키고 이를 학습할 수 있는 기회들이 더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2. 인턴십의 재설계: 이제 인턴을 단순 입력이 아니라 ‘사고의 근육’을 키우는 프로젝트형 트랙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AI가 만든 자료를 검증하고 투자 메모 초안을 작성해보는 등, 실질적인 판단 능력을 기르는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는 늘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본질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설레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AI가 부동산 업계의 일하는 방식을 바꿔놓더라도, 상업용 부동산이 결국 '사람'의 판단과 협상으로 움직이는 산업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후배들의 성장을 돕는 새로운 사다리를 놓아줄 때, 우리 업계의 전문성도 더 단단하게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부동산 현장에서 애쓰시는 모든 분들의 건승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