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작가 되기 (14)

드라마는 대사 빨

by 박길숙

드라마 설계자


연예인들이 빛을 발하는 건 본래 멋지고 예쁘기도 하지만 조명빨, 화장발, 머리빨, 의상 빨 등등 많은 요소가 더해져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라디오 드라마,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가 죽지 않고 살아나려면 대사빨이 좋아야 합니다. 좋은 대사 빨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처한 상황, 상대 배역과의 호응 등등 다양한 환경에서 만들어집니다. 대사빨이 빛을 보려면 등장인물의 성격이 명확해야 하고 상황이 맞아야 합니다. 저는 드라마 설계자는 작가가 아니고 등장인물이라고 봅니다. 드라마는 한마디로 말하면 작가 부여한 성격에 따라 등장인물이 스스로 움직이며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고요. 등장인물이 운명을 개척하면서 쏟아내는 말이 대사입니다.


대사가 차지하는 비중


TV 드라마는 대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80% 정도 된다고 봅니다. 나머지는 장면을 묘사하는 지문이 차지하고요. 이에 비해 라디오 드라마는 대사가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바람이 몹시 부는 정경 묘사를 할 때 TV 드라마 경우 <씬 1; 공사장 전경 (밤) 휘몰아쳐 가는 광풍, 휴지조각이 날린다> 이렇게 명시를 합니다. 반면 라디오는 이 상황을 강한 바람 소리 효과음과 대사로 정경을 말해줘야 합니다. 이 때문에 라디오 드라마 대사는 더 섬세하고 선명해야 한다는 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라디오 드라마 대사 특징


드라마 대사는 많은 역할을 합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첫째가 사건의 사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보 제공이지요. 나는 어디를 간다. 누구를 만났다 등 등장인물이 대사를 통해 현재 일어나는 사건 정보 배경 정황 등을 알려주고요. 둘째는 등장인물의 심리와 성격을 말해줍니다. 등장인물이 만약에 “나 이래 봬도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야. 인천 노랑 집도 거쳤고 군산 쉬파리 골목에도 있어 봤어. 너 나한테 공갈 때리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이런 대사를 날렸다면 심리 상태와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라디오 드라마 대사는 사건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등장인물이 “당신 갈 곳이 없다며? 내가 일자리 주선해 줄테니까 우리 같이 마산으로 가자. 당신 편지 받고 얘기 다 해놨어” 이렇게 나오면 청취자는 사건 배경이 어디로 이동할지 감을 잡고 함께 움직이는 겁니다.


좋은 라디오 드라마 명대사를 보면 심리 표현이 잘 되어 있고 짧습니다. 이야기를 너무 많이 꼬아대지 않고 질질 끌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현장감이 살아 있습니다. 문학적인 미사여구나 현학적인 대사, 관념적인 대사는 귀에 쏙 들어오지 않습니다. 좋은 대사는 삶의 현장을 느낄 수 있는 땀 냄새와 눈물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 배역과의 충돌과 화해가 충분히 느껴지는 통통 튀는 대사가 청취자의 사랑을 받습니다. 라디오 드라마 대사는 등장인물 인생 역정 스토리 라인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에 한 두 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직접 써보시면 좋은 대사 빨 나쁜 대사 빨을 스스로 체득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역량이 늘어나게 되어 있으니까요. 라디오 드라마 작가 (TV를 포함해서) 되기로 마음먹으신 분들은 꾸준히 써보시는 게 지름길입니다.


대단하신 성우(聲優)의 내공


저는 라디오 드라마 원고를 쓰고 나면 세 번 간이 콩알만큼 쪼그라듭니다. 한 번은 PD가 제 대본을 검토할 때입니다. 어느 때는 단숨에 훅 읽고 “좋은데요” 하면서 엄지 척하는데 이런 경우는 열 번 중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합니다. 대부분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앞 장 뒤 장을 되짚어 펼쳐보면서 심각하게 숙독합니다. 드라마를 분석한다는 건 흐름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PD가 막힌 부분을 짚어내고 대사의 허술함을 찾아내 조목조목 설명할 때 옥죄는 긴장감은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본이 완성되면 두 번째 관문이 저를 기다립니다. 성우분들이 대본 연습할 때인데요. 수많은 드라마 대본을 접해본 성우의 안목은 정말 대단합니다. 대사가 입에 착착 감기는가? 배역을 맡은 인물로 쉽게 빙의될 수 있도록 등장인물이 매력적인가? 살아 있는 소재인가? 구성이 탄탄한가를 순간적으로 포착, 대본 퀄리티가 높은지 낮은 지를 가감 없이 이야기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해줘도 “내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지레 겁을 먹을 때가 많습니다. 대본 연습할 때마다 연기자들의 숨소리까지 체크한다는 김수현 선생님의 당당함이 부러워서 “나도 한번 그래 봐야지”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 본 적은 없습니다.


세 번째 간이 콩알만 해질 때는 방송이 나갈 때입니다. 딱히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들어서 혼자 있는 방에서도 쥐구멍을 찾습니다.



그럼에도 기뻤던 순간은 많습니다.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차태현 씨 엄마 최수민 성우가 주연을 맡아 제 드라마를 녹음했을 때 일입니다. 라디오 드라마 스튜디오는 뉴스나 음악 프로그램 스튜디오와 달리 특별한 장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두 세개 정도입니다. 드라마 규모에 따라 등장하는 성우도 많고 생 효과음 장비까지 있어야 해서 스튜디오가 아주 크고요. KBS 견학홀을 돌다 보면 대형 유리창을 통해 라디오 드라마 제작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라디오 드라마 스튜디오 수가 적다 보니 녹음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녹음이 끝나면 바로바로 방을 비워줘야 합니다. 그런데 제 드라마 녹음이 다 끝나고 고생하셨다고 성우분께 인사를 하는데 최수민 씨가 나오지 않아 들어가 봤더니요 “눈물 때문에 못 나가고 있어요. 드라마를 왜 그렇게 슬프게 써서 나를 울게 만든대” 이러는 겁니다. 작가로 살면서 들어 본 칭찬 중 최고였습니다.


좋은 애드리브, 최고의 유기농 양념


드라마 대사에서 애드리브가 진가를 발휘할 때가 있습니다. 애드리브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대본에 없는 즉흥 대사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는 뜻의 라틴어 ad libitum에서 온 것입니다. 저는 <살인의 추억> 마지막 대사 송강호가 툭 던진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이 애드리브를 최고로 칩니다. 대단한 순발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디오 드라마에서도 간혹 애드리브를 치는 성우가 있습니다. 연기를 하다가 툭 던진 애드리브가 본 대사를 살리는 때가 많아서 저는 좋은 양념으로 고맙게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물론 지나치면 당연히 컷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대개는 2% 부족한 곳을 채워준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넘어갑니다. 그런데 어떤 작가들은 애드리브를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계산해서 작성한 대사가 흐트러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지요. 또 애드리브가 여러 번 겹치면 녹음 시간이 초과해 잘라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본을 쓸 때 가령 10분짜리 드라마라고 한다면 9분 30초 정도 분량으로 씁니다. 음악, 효과도 1초 2초라도 더 깔면 여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했던 드라마 대사를 늦게 올려드려 죄송합니다. 도움은 되셨을지 걱정도 되네요. 요즘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매력적인 세계관 설정에서 팬덤을 모으는 캐릭터 창조까지 성공한 작가들의 66가지 노하우를 담은 <넷플릭스처럼 쓴다>입니다. 실전 연습을 할 수 있는 페이지도 있어서 공부해보니 도움이 많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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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이 말했다지요. “내가 지금까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살았던 많은 이들의 어깨에 올라타서 앞을 바라봤기 때문이다”라고요. 찾아보면 훌륭한 라디오 작가분들 참 많습니다. 라디오 작가를 꿈꾸시는 분들, 주저하지 마시고 훌륭하고 좋은 작가의 어깨에 많이 올라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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