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벌판과 광화문 광장 같던 그 마을을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으로 보며
어릴 적 나는 산속에서 살았다. 그곳에는 우리 집을 포함해서 단 두 집이 있었다. 내게는 네 명의 남동생이 있어서 동네에서 독수리 오 형제로 불리곤 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동생들과 함께 집에서만 놀아도 심심할 틈이 없었다. 가끔 마을에 볼 일이 있을 때는 온 가족이 10분 정도 걸어서 다녀왔다. 일요일이면 교회 주일학교에 갔다. 문제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아빠는 아침 일찍 출근하시고 엄마는 갓난아기를 포함한 나머지 동생들을 돌보셔야 하기 때문에, 나 혼자 학교에 다녀야 했다. 만 6살의 아이가 2km 정도 되는 길을 매일 왕복해야 한다.
등굣길은 험난했다. 대개 3-40분을 어림잡고 집을 나서야 한다. 두 살 터울의 둘째 동생이 취학하기 전에는 혼자 산길을 내려가는 것도 무서웠다. 산을 내려와 우리 마을, 중세동을 가로지르고 나면 초등학교 1학년인 내게는 가파른, 한당골이라는 언덕을 넘어야 한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언덕길에 들어서면, 친구들이 했던 무서운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숲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귀를 틀어막고 앞만 보면서 헥헥대며 겨우 언덕을 넘는다. 이제 긴 평지길이 1킬로 정도 남아있다. 가끔은 쉬어가며 가끔은 친구들을 만나 장난을 치며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도착한다.
어린 우리들에게 중세동은 거대한 도시였다. 마을회관과 슈퍼, 교회가 있는 ‘양지뜸’은 도심, 차도를 건너 동쪽에 있는 ‘응지뜸’은 부도심, 조금 떨어져 있는 ’ 구억들’ ‘사봉’은 위성도시, 우리 가족이 살던 ‘삼박골’은 중세동 안에서도 시골로 분류됐다. 각자 자기가 사는 곳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알량한 지역감정으로 서로 다투기도 했다. 그러다가 상세동, 방동 등 외부의 친구들을 만날 때는 하나의 중세동이 된다. 마을에 잔치가 있을 때 모이는 마을회관 앞 공터는 우리에게 광화문 광장이었고, 정월대보름 밤에 불장난을 하며 뛰어놀던 논밭은 만주벌판이었다.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가끔 고향을 방문할 때가 있다. 몇 년 전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에 잠시 들렀다. 참 신기한 일이다. 거인국에 갔다 돌아온 걸리버가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울창하던 산봉우리가 이제는 나지막한 뒷동산이 되어있었다. 길고 넓게 뻗었던 등굣길은 이제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좁은 시골길로 변해있었다. 운동회, 쉬는 시간, 방과 후의 수많은 이야기가 담긴 드넓은 운동장은 아담한 시골학교의 그것이 되어있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세동을 떠난 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거인국과 같던 그 세계를 한 뼘만 한 스마트폰에서 지도로 보고 있자니 참 묘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내 기억 속 세동은 여전히 거대하다. 그 시절의 기쁘고, 슬프고, 뿌듯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마을 곳곳에 새겨져 있다. 그곳에 있던 친구들 형누나동생들 그들의 부모님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지금 나는 도시와 숲과 사람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어쩌면 중세동은 늘 내 곁에 있었던 것 같다. 내 어릴 적 도시와 숲, 그때의 친구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