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산속을 여행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고대했던 하늘의 지붕이 산신령처럼 '두둥!'하고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의 감정은 두려움과 감동,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올랐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처음으로 느껴본 '슬픔'의 감정이 아닌 다른 감정의 눈물이었다. 그때 나의 어린 가이드는 내가 감정을 추스르는데 옆에서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그 눈물을 이해할 수 있다고.
그리고 육아를 하면서 또 한 번 슬픔의 감정이 아닌 어떠한 감격으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기록하기로 한다. 물론 이 감정은 아직 내가 온전하지 않은 호르몬 때문일 수도 있다.
갓난아이는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울음소리로 그 원인을 구분한다고 한다. (네, 오,에, 얼, 헤/ 소리의 강도와 울음의 길이 등) 처음엔 아기의 울음소리가 구분도 안되었을뿐더러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너무 어려웠다. 그저 배고프거나, 졸리거나, 기저귀가 불편하다는 아주 아주 간단한 기초 요구사항인데도 말이다. 참다못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강성으로 바뀌고 그 끝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았을 때는 어리숙한 엄마인 내가 너무 미안한 마음이 힘들어서 같이 엉엉 울기도 했다. 이후 아이가 태어난 지 1~2개월 지나고 아기가 눈 맞춤을 시작하고 나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 눈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사람의 눈을 오랫동안 응시해 본 적이 있던가. 우리나라에서는 상대방을 마주하는 예의로 눈을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다. 서열이 있는 관계라면 특히 그렇기 때문에 시선은 앞으로 향하되 눈을 보지 않고 미간, 인중, 턱 정도로 눈높이를 둔다. 그러나 초보 엄마는 어린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조금이라도 마음을 더 읽고 싶어서 휴대폰을 보기보단 아이의 눈을 좀 더 열심히 바라보기로 했다. 그때였다. 평소와 같이 눈 맞춤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때의 감정 역시 두려움과 감동, 경이로움이었다. 몹시 아름다운 아이의 맑고 순순한 눈은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예전에 SNS을 통해서 세르비아의 한 행위예술가의 <예술가가 여기 있다>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다. 행위예술가는 조명이 비추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관객들은 작가의 맞은편 의자에 앉도록 안내받은 뒤 어떠한 대화나 표정 움직임 없이 작가와 눈을 마주하는 전시였다. 그때 아주 오래된 옛 연인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둘은 눈물을 흘린다. 그때는 와닿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그저 그 눈빛이 아름다웠다.
슬픔(나쁜 온갖 감정)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눈물을 경험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양파로 흘리는 눈물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