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에게 미안했던 첫 만남
차은우 태교를 했었다. 임신 중에는 아름다운 말만 하고, 듣고, 생각하라는데 회사 다니느라 그러지 못해서 임신 중기쯤에 부랴부랴 휴대폰 메인 화면을 배우 '차은우' 웃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게 나에겐 이른바 태교였다. 평소에 차은우 팬도 아니었고 감히 건방진 이야기이지만 차은우에게 남성적인 매력을 느끼진 못하였으나 남녀 구분 없이 아름다움으로는 그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예쁜 얼굴을 보면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태교 하지 못하는 엄마의 죄책감을 면죄부 삼았다. 그렇다. 나는 아기가 건강하고 '예쁘게' 태어나길 바랐다.
어렸을 때는 외면이 아닌 내면을 가꿔야 한다는 교육을 안팎으로 받고 살았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가치라고. 보통 그런 말은 외모에 대한 이야기나 행동을 할 때 자주 나왔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 그러나 내 기준엔 '외면 말고 내면'이란 말은 틀린 말 같다.
"착한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낫다. 못생긴 것보다 착한 것이 낫다."- 오스카 와일드
외면은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며, 아름다움은 권력이다.
아기는 뱃속에서 내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차은우'를 바랄 얼굴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그 정도 미모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아기의 생김새마다 '콩콩팥팥'도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열려있는 것 같아서 출산일이 가까울수록 아기의 외모가 더욱더 불안해져 왔다.
"너무 못생겼으면 어쩌지? 차은우는 아니더라도 매력이 있으면 좋겠다."
아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온갖 외모에 대한 다소 허영스러운 명언처럼, 우선 '예뻐야'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기를 처음 만났을 때, 그 '못생김'에 너무 당황했었다. 간호사는 마트로시카처럼 돌돌 말아서 내 머리 위로 아기 얼굴을 떨구어 보여줬는데, 내 시선에서는 아이의 커다란 콧구멍 밖에 안보였다. 제대로 못 봤지만 못생겼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 "선생님. 저 빨리 재워주세요." 나는 거사를 치렀으니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나머지 수술시간 동안에는 빨리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거기에는 아이의 충격적인 첫인상을 지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꼬맹이는 우리 하나 믿고 세상에 왔는데, 엄마란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니 정말 철이 없다는 것도 틀림이 없다.
아이는 백일이 지났다. 우리는 다행히도 그동안 아이에게 콩깍지가 써졌다. 아이는 보기만 해도 예쁘다. 웃고, 자고, 울어도 아이는 예쁘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꽃, 그림, 금은보석들. 그러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구태연한 말이 이제는 이해가 간다. 아이는 무엇보다 아름답다. 사랑이 차오른다.
(어찌 되었든 아이는 아름다운 청년이 그리고 어른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