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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동네를 떠나는 일

대흥동에 부쳐

by 박나옹

마포구 대흥동은 처음으로 출가하여 살게 된 동네이다. 이곳은 염두에 두었던 동네는 아니었다. 남편의 회사는 과천에 있었고, 내가 다니는 회사는 상암이었다. 신혼집을 구하기 위해서 각자 회사의 중간 지역쯤부터 시작하여 3호선, 2호선, 7호선 라인을 뱅글뱅글 돌다가 마포에 있는 대흥동이라는 동네에 자리 잡게 되었다. 처음 이 동네에 인상은 '촌스러움'이었다. 처음 와보는 동네였고 전철역에 나왔을 때는 좁은 인도와 오래되고 정리안 된 쾨쾨한 건물들이 즐비했다. 평생 한 동네에서만 오래 살다가 처음으로 낯선 동네로 갔었을 때는 새로운 곳이 어색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제 4년을 살고 헤어질 때가 되니 행복한 추억만 생각나 영 떠나기가 싫다. 살면서 설레게 만들었던 곳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었고, 떠나기 전에 그곳에서 행복했던 것들을 두서없이 남겨보기로 한다.

대흥역을 나와서 좁은 인도를 따라 보았던 가게들 (좌) 현존/ (우) 현재 가게 이전


- 경의선 숲길에서 밤산책

마포구에서 용산구까지 이어진 선형 공원이다. 연남동에서 공덕까지 평지길로 걸을 수 있는데, 좌우로 멋진 카페, 식당들이 즐비해서 구경하다 걷다 보면 지루하지가 않다. 특히 대흥동 일대 구간으로는 봄철에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을 만끽할 수 있다. 이사 전까지 아이와 함께 오전 오후로 매일 산책을 했다. 매번 봄이 기다려지는 곳이다.


경의선 숲길 산책 (대흥동 구간)


- 한강에서 자전거 타기 (자전거 배우기)

거주한 지 거의 일 년 만에 길만 하나 더 건너면 한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소름이 돋았었다. 운전하고 다니면서 왜 그것을 몰랐을까. 그 액자 속에 있는 그림처럼 발견했던 한강 입구를 보고 우리는 예쁜 자전거를 사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자전거를 배웠고, 몇 달 뒤에는 자전거를 타고 한강으로 출퇴근을 했다. 자전거 출퇴근을 하는 날이면 한강에서 먹을 라면에 출근길이 항상 설레고 흥분되었다.

자전거타기성공, 나의 소확행


- 마포아트센터와 실력 좋은 요가원

햇빛이 들어오는 마포아트센터 수영장과 실력 좋은 선생님들이 많은 요가원은 나에게 행복이었다. 못 가본 요가원들이 있어 아쉽다.


- 휴식이 있는 참새방앗간 위스키바 '고리'

우리가 이사하고 2달 뒤에 집 앞에 생긴 곳인데, 남편과 매일매일 퇴근하면서 이곳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ㄴ'자 바테이블이 있는 작은 위스키바이다. 남편이 본격적으로 위스키 입문을 하면서 아드벡 코리브레칸에서 옥토모어까지 피트 위스키로 마니아가 되는 일엔 사장님의 도움이 아주 컸다. 사장님은 위스키의 맛뿐만 아니라 제조 생산, 공정, 운영자, 역사 등을 술 30ml와 함께 서빙해 주어 우리는 위스키를 재밌게 맛볼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위스키의 색, 향, 맛, 여운 등을 배우고 즐겼다.

공간이 꽤 밀착되는 느낌이라 멍 때리다 보면 간혹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엿들을 수 있다. 그곳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아이 준비를 하면서 2년간 발길을 끊었었지만 매일 그리워했던 곳이다. 사장님의 다정함도 좋지만 주종 추천 센스와 단골손님들의 기호, 마셨던 술을 오래되어도 기억하는 것은 항상 놀라운 일이었다.

재밌는 것은 사장님이 컵라면을 아주 잘 끓이신다. 여름엔 냉면, 겨울엔 오뎅을 판다. (외부음식 가능)


우리 부부 대흥동 라이프의 시작과 끝

https://naver.me/Fk73Own0


- 자전거 마니아 사장님이 있던 '차돌소풍' (폐업)

사장님 부부가(주로 남자사장님) 여유롭게 장사하시고 예약손님 없을 경우 일찍 문을 닫았는데, 우리 얼굴을 보면 닫던 문을 다시 열어주시곤 했다. 임신 기간 동안에 이래저래 바빠서 못 가다가 가려고 보니 폐업을 하셨다. 본인 술안주라고 곱게 싸둔 고기 덩어리를 썰어서 서비스로 내어주시곤 했는데 그 맛은 어디 가서 먹을 수 없는 천상의 고기맛이었다. 사모님이 끓여주시는 명란탕도 빠질 수 없는 메뉴다. 강남 쪽에 사장님이 전수해 준 가게가 있다고 하는데...


- 일주일에 1.5회 방문했던 달팽이가 그린집 황소곱창

친절한 사장님 부부가 항상 반갑게 맞이해 주던 곳. 통창 창가자리에 앉아 먹는 것을 좋아했다. 정말 자주 방문했던 곳인데 곱창맛이 평균적으로 괜찮지만 등락이 좀 있다. (맛있을 때는 아래서 소개하는 '장가네' 뺨을 쳤다.) 살면서 가장 많이 간 곱창집이다.

https://naver.me/x7ndwbgM


- 출산 후, 처음 맛본 생맥주 집. 새로 생긴 힙가게 '동휴'

임신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집 바로 앞에 간판 없는 미스터리 한 가게가 생겼다. 'ㄷ'자 바테이블의 가게였는데 무엇을 파는지 전혀 알 수가 없지만 주택가 골목 구석에 자리 잡은 곳에 외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통유리의 가게는 테이블과 중앙에 자리 잡은 독특한 입구 가림막 커튼만 보였다. 간판 하나 없는 작은 가게가 오픈 전부터 줄을 서는데 이유가 궁금했다. '뭐 파는 집일까.'

출산하고 백일 후에 아이가 통잠을 자면서부터 우리 부부는 일탈을 해보기로 작당 모의를 했다. '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둘 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이가 밤수면에 들면 문 앞에 있는 미스터리 한 가게에 가서 후다닥 맥주를 마시고 오는 앙큼한 계획이었다. 10시에 남편이 먼저 가서 자리가 있음을 확인한 다음에 나는 아이를 한 번 보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재 빠르게 뛰어나갔다. 설령 도둑질하는 느낌으로 떨리고 설레게 마음으로 아주 오랜만에 밤마실을 나갔다. 일 년 만에 처음 마시는 여름 맥주는 목청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그날 우리는 아기의 수면 CCTV를 지켜보며 가게의 메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시켰다. (메뉴의 양이 많지 않아 배고프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일 맛있었던 피스타치오 오일과 오징어 구이 메뉴를 한 번 더 시켰다. 그날 밤 성공적인 밤마실은 너무 행복했고, 이후로 여러 차례 동휴로 밤마실을 했다. (어느 날 아이즈매거진에 실려서 동휴에 가기 어려워지기 전까지.) 우리는 그곳에서 육아 스트레스를 말끔히 풀었다.

가게도, 메뉴판도, 음식도, 사장님 부부와 스탭 모두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곳이다.



https://naver.me/Ixs9cvHS

- 곱창계의 샤넬 장가네 (폐업)

좋은 곱창이 있을 때만 여는 곱창계의 샤넬 장가게. 사장님이 꼬장꼬장하셨으나 맛은 비교불가다. (내 기준에서는 우정양곱창보다 더 맛있는 집) 코로나 여파를 이기지 못하시고 문을 닫았다.


- 기타: 유사상품 없는 듯한 비교 불가 양고기 맛집 램랜드, 수제비 맛집 마포손칼국수, 사장님의 번뜩임과 요리가 즐거운 집 요수정, 삼겹살 후식 볶음밥 최고 맛집 무쇠뚜껑, 가장 좋아하는 평양냉면집 을밀대, 한동안 주말 아침이었던 크리크 샌드위치, 한동안 주말 간식이었던 잼베이커리, 롤앤롤, 세끼김밥, 신한은행 옆 버스정류장 앞 타코가게, 잘생긴 사장님이 있는 커피맛집 브릭스, 햄카츠가 맛있는 킷사 코이, 숨어있기 좋은 홉커피, 한동안 자주 갔던 존스몰로스터리, 아이엠 베이글...



마포구 대흥동엔 여러 가게들이 생기고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실력이 좋았지만 아쉽게 사라진 가게도 있고, 당최 왜 없어지지 않는지 궁금한 가게들도 남아있다. 그리고 젊고 실력 있는 사장님들의 가게도 많이 생겼다.


이사 가기 전 마지막 토요일 우리는 아이를 재우고 동휴로 가서 마지막 일탈을 먹었다. 동휴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다시 고리로 향했다. 그리고 조금 뒤에 고리에 동휴 사장님과 직원분, 킷사 코이 사장님(연인)이 모두 모여 지난 이야기와 앞으로의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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