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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메이커 Aug 10. 2018

경비실 에어컨 설치. 얼마면 돼?

같이 사는 세상을 위하여

나는 웬만해서는 에어컨을 잘 켜지 않는다.

에어컨 바람은 두통을 유발한다. 차라리 살짝 땀이 나는 더운 날씨를 선호하는 편.


작년 여름에는 굳이 에어컨을 켜고 자려는 남편을  말렸다.  '우리는 냉방병에 걸릴 거야. 일어나면 머리 아프고 구토가 날 거야. 그냥 선풍기가 켜고 자.'

하지만 올해 더위는 상황이 좀 다르다. 뜨거운 햇볕에 습도까지 높고 동남아스러운 날씨에 하루에 3번 이상 샤워를 하게 된다. 더위에 찌들었다가 갑자기 에어컨이 만들어낸 시원한 바람을 쐬고 나면 기분이 확 좋아진다.


캐리어 할아버지 사랑해요 

어제는 처음으로 에어컨을 켜고 잤다. 분명 제습 기능으로 설정하고 잠을 청한다. 피부가 뽀송 뽀송하다. 기분은 산뜻하다. 이번 여름은 에어컨이 나의 기분을 통제하고 있다.  폭염주의 날씨예보가 된 날은 재택근무를 하며 에어컨과 함께 아이스커피를 마시기. 이런 행복을 알게   에어컨 발명가 캐리어 님께 감사.



우연히 들여다보게  경비실


이날도 숨이 턱 막혀서 한숨이 나올 정도의 날씨였다. 세평 남짓한 경비실 내부에는 선풍기 세 대가 털털털 소리 내며 돌아가고 있다. 에어컨 없는 경비실.. 아저씨는 잘 버티고 계실까.


오후 12-3. 하루에 가장 더운 시간

에어컨이 없는 경비실은 얼마나 더울까... 선풍기 3대에 둘러싸여 연신 부채질을 하고 계시는 경비아저씨를  뒤로 경비실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수박을  갖다 드릴까? 아이스크림을 가져다 드릴까? 혹시나 동정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망설이기도 여러 이었다.

우리 아파트 경비실 아저씨는 2인 1조로 교대 근무를 한다. 아저씨들은 평균 나이 60대 중후반이다. 누가 봐도 경비원 아저씨가 아닌 '경비원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에워싼 세 대의 선풍기마저 10년 넘게 쓴 듯해 보였다. 선풍기의 달달달 소리가 나의 귓가에도 들린다. 딸각 딸깍 저 중 고 버튼을 꾹꾹 눌러 속도를 조절하는 선풍기.


선풍기만 돌아가는 경비실

수박이 당신을 위로할 수는 없지만.

마침 집에 시원한 수박  통이 있었다.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경비실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장을 보러 나가며 수박을 가져다 드리면서 경비실 아저씨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아저씨, 수박 좀 드세요."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버릇 들어요. 주지 마세요."

"그게 뭐 어때요. 맛있게 드세요."

(수박 밖에 못 드려서 죄송해요 ㅠㅠㅠㅠ)


 


남편은 그런 나를 멀찍이 바라보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 정도로 됐어. 충분해. 잘했어.'  남편은 평소 오지랖이 큰 내 성격을 알기에 혹시나 앞장서 일을 벌일까 두려운 모양이다. 경비실 아저씨는 내가 수박을 드리고 나가자,  바로 수화기를 들고 앞 동 경비실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봐, 목마르지 않아? 수박 파티하게 건너와~"


이런.... 8조각 수박을 동료와 나눠 드신다니  많이 드릴걸 그랬어…


경비실에 에어컨이 있어야만 


정말 올해도 에어컨 없는 경비실을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할까.

"오빠, 내가 에어컨 설치하자고 인쇄물을 만들어서 게시판에 붙여볼까?"

"................ 음..."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 심한 것 같아... 아.. 그냥 미안하네. "


남편은 첫째 아이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가야, 너희 엄마 마음속에는 잔다르크가 있단다."

"휴....................."


어떻게 해야 에어컨 설치 이슈를 만들 수 있을까. 며칠 동안 생각이 깊어졌다.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바로 다음 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한 용감한 주민분이 에어컨 설치 의견에 대해 게시를 해주셨다.



 


정말 감사했다!! 많은 주민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TV에 나오는 에어컨 없는 경비실 아파트가 우리 아파트였나며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어디에나 반대 세력은 있다. 게시물 중앙에 <절대 반대> 입장을 표명하신... 주민도 있었다. 반대의견의 입장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찬성이요!'

'제발 빨리 하루라도 빨리요! '

'반대하시는 분들은 이유가 뭔가요? '

'누군가의 아빠이고 할아버지입니다. '

'투표합시다!'

'누가 반대하나요? '

'무조건 찬성합니다.'



이틀 뒤. 갑자기 게시글이 사라졌다. 뭐지? 왜 없어진 거지? 게시글이 있던 자리를 두리번거리니 다른 게시글이 붙어있다.


 드디어 에어컨 설치를 위한 찬반투표를 진행하겠다는

게시물이었다. 에어컨을 설치할 경우, 세대당 얼마의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지 계산도 되어 있었다.


그래. 어디 보자. 에어컨 설치 얼마면 돼?

한 가족당 얼마를 부담하면 경비실에 에어컨을 켤 수 있는 거야?




280원? 응?

280원?

세대당 부담하는 전기료가 한 달에 280원? 고작 그것뿐이었어? 2800원도 아니고. 280원이었다니.



나는 가장 먼저 찬성란에 사인하고, 감사하다는 메모를 남기고 왔다. 누구한테 감사를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의견을 공론화시켜준 누군가에게. 또,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에어컨을 설치해준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에게도 고마웠다.



에어컨 펑펑 트세요. 경비실 아저씨.

하루라도 빨리 에어컨이 설치되길 바라본다. 오래간만에 우리 동네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에어컨 설치 후 경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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