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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밥 짓는 사람 Feb 28. 2024

어제는 허탈한 기분이었다

2009.3.21.

공강인 금요일. 

남들은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을 하루를 책이나 보면서 지냈다. 

독서라는 게 요즘 같은 시대에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금세 한 권을 들고 집중하다 보면 하루가 꼬박 그냥 지나가버리니, 

자격증과 취업준비를 하기 바쁜 대학생들에겐 시간낭비로 여겨지니까.


날이 저물어서 엄마가 퇴근하실 시간에 맞춰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핸드폰이 생긴 이래로 누군가를 무작정 기다리지 않는 요즘, 핸드폰이 없는 엄마가 언제 올지 모른 채 

무작정 정류장을 서성거렸다. 여유롭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나와는 달리 퇴근길의 사람들은 모두 바빴다. 

학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꼬맹이들, 퇴근길에 시장을 두 손가득 보고 들어가는 아줌마들, 

피곤해 보이는 아저씨들, 학생들..  


그 사람들 중 우리 외할머니를 닮은 (굽지 않은 작은 체구에 다부진 얼굴을 가진) 할머니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니 그 예쁜 얼굴에 안경을 왜 끼냐며 찡그린 얼굴로 담배연기를 내뿜으셨다. 

30분가량 서 있으면서, 지루했던 참에 내게 말을 걸어준 것도 재밌는데, 

이쁘다고 해주시니 기분 좋았다.      


 "할머니, 멋으로 낀 게 아니구요, 눈이 나빠서 낀 거예요."     

 "그래? 난 또 멋으로 낀 줄 알았지. 쓸데없이 얼굴 가리고 다니면 못써."     


사실, 난 어릴 때 눈이 좋았다. 교회 집사님 중에 멋쟁이셨던 분이 있었다. 

그 분이 안경 낀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눈이 좋음에도 안경을 끼고 다녔다. 

도수도 안 맞는 것을. 그 뒤로 중학생이 되면서 눈이 나빠졌으니까 뭐 할머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다.     


 "난, 노인정에 있다가 집에 가는 길이야."     

 "아, 전 저희 엄마를 기다리느라 여기 서 있는 거예요. 하하."     


오래 한 자리에 서 있는 것에 대해 변명이라도 하듯, 할머니 앞에서 머리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나를 한번 쭉 쳐다 보시곤 담배를 쭉 빠시더니 할머니는 쿨하게도     


 " 그래. 알았어. 그럼 수고해."     


하시며 가시던 길을 가셨다. 이상하게 할머니들이 피는 담배는 그렇게 따라 피고 싶다. 

지나온 긴 세월과 앞으로 살 짧은 세월이 담배에 그대로 녹아 한 모금의 연기로 태워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세월에 초월함을 담은 듯한 그 표정이 그렇게 만든다.     


1시간이나 지났는데, 엄마가 보이질 않는다. 평소 6시 30분에서 7시 30분 사이에는 

꼭 들어오셔서 6시 30분 전에 나갔거였는데.. 핸드폰이 없으니 걱정이 든다.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10분 정도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결국, '엄마를 못 만났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은 정류장에서 엄마를 만나고, 엄마와 맛있는 것을 사서 집에 가는 것이었는데.. 쓸쓸히 혼자 걸어가니 허탈했다.      


아니, 사실 내 허탈함은 엄마를 만나지 못함이 아니다. 어제의 허탈함이 고스란히 이어졌을 뿐이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얼굴만 아는 사람과 '바'에 가고 아마추어급 저질 칵테일쇼가 좋다며, 

바텐더들과 히히덕대는 그와 친구가 되겠다고 술값을 지불한 나. 그런 나에게 허탈한 것이다.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점철된 대화.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허탈한 사람들. 허탈한 관계.     

 

엄마를 기다리며 만난 할머니는 내 얼굴에서 무엇을 보셨던 것일까. 

어제의 일로 그늘져 있는 얼굴로 서 있던 내가 안쓰럽게 보여 말을 거셨던 것일까. 

집 앞까지 다 왔을 때, 내 생각은 정리가 되었다. 


'말 한마디라도 그 안에 진정성만 있으면 그게 대화다.'


일방적인 잡담과 소통의 대화의 차이는 바로 진정성. 

칵테일을 마시며 나눴던 대화가 아닌, 모르는 할머니와 길가에서 나눈 대화, 

그게 내가 원하는 대화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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