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
여름의 담장을 타고 오르는 능소화는, 마치 햇살을 품은 고운 빛깔의 목소리처럼 다가온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꽃잎은 가만히 흔들리며, 속삭이는 듯한 음성을 흘려보낸다.
그 목소리는 오래 귀에 남는다. 불현듯 찾아온 위로처럼, 잠시 멈추어 서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붉고 주황빛이 뒤섞인 꽃잎은 여름의 열기를 닮았지만, 그 안에는 나직한 다정함이 숨어 있다. 격렬함이 아니라, 고요 속에 담긴 힘. 그 속삭임 앞에서 오랫동안 숨을 고르게 된다.
능소화를 바라보다 보면 예전의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가까운 친구가 힘든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많은 말을 건네지 못하고, 나는 그저 그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친구가 말했다.
“네가 말 안 해줘서 고마워. 그냥 옆에 있는 게 힘이 돼.”
그 말이 능소화의 속삭임처럼 오래 남았다. 꽃잎 하나의 빛깔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무더위에 지쳐 터덜터덜 걷던 길, 벽돌담 위로 쏟아지듯 흐드러진 주황빛 능소화가 눈길을 붙잡았다. 그 앞에서 멈춰 서 있는데,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가 말을 건넸다.
“이 꽃은 참 대단해요. 담을 스스로 기어올라 해마다 저렇게 피니까요.”
그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의 긴 위로가 아니어도, 담을 오르듯 묵묵히 피어나는 꽃처럼 사람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능소화는 여름 햇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이다. 뜨거운 계절 한가운데에서 더욱 짙게 피어나지만, 꽃잎의 선명한 색깔은 마음을 쉬게 하고, 그 안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다정함을 느끼게 한다. 꽃잎마다 스며 있는 색의 결은 마치 누군가의 부드러운 음성과도 같다. 화려하지만 조용하고, 선명하지만 나직하다.
그러나 햇살을 머금은 채 오렌지빛에서 붉은빛으로 번지며, 뜨거운 한낮에도 온기를 품는다. 그 빛깔은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멈추게 만든다. ‘잠시 서서 나를 보라’는 듯, 꽃잎 하나하나가 조용히 말을 건넨다.
이 꽃 앞에서 잠시 발길을 붙잡혔다. 크게 웃지 않아도, 시끄럽게 말하지 않아도, 작은 눈짓 하나, 미묘한 입가의 움직임만으로도 상대의 마음을 감싸 안을 수 있다. 능소화의 속삭임은 그 작은 미소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살다 보면 마음이 지치고,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굳이 긴 위로나 격려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누군가의 조용한 미소, 잠깐의 눈 맞춤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마치 능소화가 벽돌담을 타고 오르며 묵묵히 꽃을 피우듯, 사람의 마음도 작은 다정함으로 위로받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바람처럼 스쳐 가는 순간들이 쌓인다. 기억조차 흐릿해지는 나날 속에서, 어쩌면 중요한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닐지 모른다. 누군가의 눈길, 한 번의 미소, 이름 없는 꽃이 건네는 작은 숨결. 그런 조각들이 모여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다시 길을 걸을 힘을 준다. 능소화가 전해오는 속삭임은 바로 그런 것이다.
다정함은 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꽃 앞에 선 나는 깨닫는다. 꽃잎 한 장의 빛깔, 작은 미소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속삭임은 내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메아리친다.
“나는 네 곁에 있다. 작은 숨결로도 널 감싸고 있다.”
여름의 능소화는 그렇게, 조용히 나를 품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