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누구에게나 무한하게 이로운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나무’다. 나무는 오랜 세월 온갖 자연재해를 이겨내며 더욱 굳건하게 한 자리에서 자리를 지킨다. 이 모습만으로도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놀랍게도 이 굳건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시작에 불구하다. 등산을 하다 보면 인간은 자연에 비하여 한 없이 작음을 깨닫게 된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고요함 그 안에 어우러진 조화를 느끼며 정상에 닿는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작게 만들어 준다. 이 황홀함도 잠시 날카로운 바람에 오랫동안 향유할 수 없다. 불편함을 느끼고 나서야 바람을 막아준 나무의 존재를 인식한다. 나무는 스스로 굳건하게 강할 수 있는 존재이며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도 맡는다.
이 고귀한 존재인 ‘나무’를 인간의 욕심으로 무분별하게 베어낸다. 천년을 이을 수 있는 나무는 자신이 도와준 인간에 의해 부서진다. 이렇게 상처받고 부서짐에도 나무는 옷으로, 가구로, 종이로, 땔감으로 또 한 번 인간을 돕는다.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다. 인간에 비하여 영생의 가능성을 갖고 있던 나무는 미래를 잃고 인간에게 작은 생명을 북돋는다. 고맙고 은혜로운 나무에게 감사함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나무가 내일을 잃으며 남긴 종이 위에 인간의 과거를 기록하는 것. 바로 글쓰기다.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를 쓴 고미숙 작가는 읽으면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읽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 쓰는 것은 내보내는 것이다. 읽고 쓴다는 것은 두 개의 활동이 아니다. 하나다. 읽기만 하는 독서는 반쪽일 뿐이다. 우리는 읽으며 깨닫고 쓰면서 나의 존재를 인식한다. 서두에 말했듯이 나무는 오로지 한 자리에서 쓰임을 다 한다. 나무의 강인함을 본받아 종이 위에 적어가는 글자들로 나만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나무의 죽음으로 나의 존재를 인지한다. 나무의 끝이 글쓰기로 쓰임을 이어나가는 재탄생의 순간이다. 거룩함과 통쾌함. 이 표현으로 나의 독서가, 쓰기가 한층 더 고귀한 시간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