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9년차가 되면서업무시간의 대부분을 익숙한 업무 처리에 쏟고 있는 듯 하다. 그러다보니 반복되는 업무에 대한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헷갈리는 업무처리를 할 때면규정을 보며 꼼꼼하게 처리했다면 요즘은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처리하곤 한다. '예전에 이 규정을 봤었었지'하며 확신이 부재된 가정과 상상을 기반으로.물론 9년간의 경험이 헛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업무 처리는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가끔씩 삐걱대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참기가 힘들다. 꼼꼼하게 업무처리를 했을 때 실수한 것과 생각없이 업무처리를 했을 때 실수했을 때의 기분은 분명 다르다. 후자의 경우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다.
시완이가 태어나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다 보니 24시간 쉼 없이 나의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도 사람이었던지 드디어 직장에서의 슬럼프가 찾아 온 것 같다.야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정규 업무시간에 강도 높은 업무를 처리할 수 밖에 없고나만의 전투를 벌인지 벌써 3개월째다.고갈될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기분이다. 업무시간에 집중이 잘 되지 않고 자연스레 잔실수가 나오게 된다. 나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업무처리를 하는 것이 어려워져근무 만족도도 떨어지고 성취감을 느끼기도 힘들다.
평소에는 참 징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업무처리를 하곤 했다. 같은 규정을 두 번 세 번 찾아보고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심사서 승인을 올릴 때면 오탈자가 없는지 내가 작성한 의견을 보고 또 봤다. 나 스스로도 조금심하다, 생각했던 업무 습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업력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레 익숙한 업무들이 많아져서일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럴 만한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은 것 또한 원인이 된 듯 하다.
오늘은 내가 4월 초에 올린 심사서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전화로 심사서의 오탈자와 규정상 틀린 부분을 말씀해주시는데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사시 어렵거나 까다로웠던 부분을 틀렸다면 나 스스로도 이해하고 죄송하다는 한마디와 함께 얼른 심사서를 수정해 전송했을 것이다. 피드백을 받은 부분은 참으로 자잘한 부분들이었고, 피드백을 들으며 '내가 저때 무슨생각을 하며 심사서를 작성했을까'라며 자책하게 되었다. 그만큼 참 한심한 오류들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다음 부분이었다. 분명 예전의 나였다면 수정을 한 뒤 심사서를 출력해서 내가 입력한 수정사항이 정확하게 반영이 되었는지 확인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수정을 요청하셨던 부분을 수정하고 난 뒤 pdf파일로 변환하고 그냥 그 파일을 첨부해 메일로 보내버렸다. 급한일도 아니었지만 누군가 나를 떠미는 듯이. 분명 나답지 않았지만 나의 심사서를 더 볼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갑자기 귀차니즘이 어디서 발동했는지 알 수 없다. 예전의 지독하게 꼼꼼했던 내가 아니었다.
지금은 메일을 보내고 급하게 퇴근하는 기차 안이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어 내일 오전에 출근하게 되면 심사서를 뽑아 다시 한 번 읽어보며 최종적으로 완벽한 심사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조금은 수고롭더라도, 나 다움을 지키는 것이 나의 정신건강에 좋다. 내가 쏟을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나답지 않은 업무처리를 하다 보면 진짜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을 굳어지게 된다. 그런 나 스스로가 싫어지는 악순환에 올라타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