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사람 사이, 그 낯선 타이밍

by 박배

기자 시절, 거의 매일 점심 미팅이 있었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밥자리는 업무의 연속이었다. 밥 한 번 같이 먹었다고 친한 사이는 아니다. 관계를 그렇게 쉽게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가 지키던 거리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국장·부장들은 이름 석 자 알고 밥 한 끼만 함께했어도, 광고든 협찬이든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그저 서로 도움이 되는 타이밍에 떠오르는 존재, 그 정도면 충분한 관계인 것이다. 그게 사회였고, 그들 기준의 ‘일 잘하는 방식’이었다.


나도 그런 판에 있었다. 수많은 관계들이 눈앞에 있었지만 바로 친한 척하지 못했다. 인연을 과장하고, 사람을 수단 삼는 일이 불편했다. 적당한 거리감을 편하게 여긴 사람들도 많았지만 현실에선 별 의미 없는 선이기도 했다.


나를 신뢰해 먼저 다가온 이들도 있었다. 광고를 제안받고, 협찬을 연결하고, 중요한 정보를 먼저 건네받은 적도 많았다. 이런 일들은 꼭 친해야만 가능하진 않다. 논리로 설득하고, 일에 대한 태도에서 신뢰를 주는 사람이라는 인식이면 된다.


그러던 어느날 내 방식에 균열이 생긴 사건이 있었다. 출입처 임원 중 존경하는 인물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고, 평소 가깝게 지냈기에 흔쾌히 응해주셨다. 기자와 취재원 사이에 오랜만에 신뢰가 오가는 기사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장이 그 기사를 들고 출입처 홍보실을 통해 신문 구독을 요청했고, 수십 부를 자기 실적으로 챙긴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내가 했으면 내 실적이었다. 그 임원과의 관계도 있었고, 기사를 계기로 구독 요청을 해도 전혀 무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후배들은 부장에게 말해서 바로잡으라고 했지만 나는 받아들였다.


관계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기사에 만족하면 알아서 챙겨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내 방식을 고집하는 사이 누군가는 인연을 자원으로 바꾸고, 또 누군가는 거침없는 친한 척으로 새로운 기회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다시는 뺏기지 않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지켜냈다. 하지만 정중하고 신중한 태도가 신뢰를 만들고 성과로 이어진다는 믿음은 여전했기에 큰 변화를 주진 않았다. 하던대로 해도 정보도, 제안도, 광고도, 협찬도 먼저 들어오는 구조를 유지했다.


조직 안에 있을 땐 꼿꼿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일해야 하는 지금, 그 거리감을 고집하기만 해선 세상과 연결되기 어렵다. 자세를 낮추고,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 돼야 한다. 먼저 말을 걸고, 밥을 제안하고, 가볍게 친한 척하는 감각까지도 익혀야 한다.


기댈 수는 있어도 기대는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관계에 선을 그어두는 것만으로는 일이 굴러가지 않는다. 충분히 교류하고 신뢰가 쌓여야 마음을 여는 것은 고수하되 관계의 거리감을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배우는 건, 그 선을 넘을 타이밍과 방법이다. 그리고 그걸 알아가면서 예전보다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사람과 일 사이의 거리를 조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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