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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Sep 21. 2024

한철 장맛비에 마음 젖지 말아요, 우리

가을장마가 오나 봅니다

사랑하는 어여쁜 아내 여니에게 03


늘 어여쁜 당신,

비루한 일상 속에 여전히 고귀한 습관은 글쓰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상한 취미도 유별난 특기도 아닌 하루하루를 비탈길에 바위를 굴러 올리는 무한반복 형벌의 시지푸스처럼 그저 써내리는 일입니다. 우울과 좌절이 밀려올 때도 생존의 기력을 부여잡게 만들어 준 것이 이 글쓰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시절 끊임없이 토해 놓은 활자와 그 자음과 모음, 그리고 띄어쓰기와 행간에 숨어든 사유들을 그려 봅니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글쓰기의 한 모양입니다. 그 편지를 한다는 것은 관계를 그리는 일입니다. 커다랗게 부풀려 말하자면 인연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입니다. 일전에도 이야기했듯이 나의 첫 글쓰기는 '편지'였습니다. 만 네 살 아이가 문장은커녕 문자도 제대로 알 길 없었던 그 시절의 편지가 지금의 글쓰기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편지글들은 대상에게 전달되어 편지 밖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듭니다. 이처럼 편지를 한다는 것은 글쓰기의 안과 밖을 이어주는 인연의 이야기가 됩니다.


여행길 (2016년 필리핀, 세부)


삶이라는 게 여행길이라면, 인연이라는 것은 여행 떠나기 전 미리 지도에 그려 본 선처럼 만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진솔한 연은 길 위에 이따금 보이는 작은 꽃, 그리고 늘어진 나무 그늘, 불현듯 눈에 들어온 돌멩이 한주먹처럼 점점이 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릴 적 번호 따라 점선이어 그림 만들듯 살아온 길을 뒤돌아 보면, 그 점들이 서로 이어져 내 길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애써 잡아 둔 것은 인연이 아니라 집착일 뿐이고, 그저 지나칠 수 있었던 작은 발견이 우연 같은 연이 될지도 모릅니다. 내게 비움과 휴식을 준 것은 그간 내가 잡아둔 이성도 절친도 가족도 아닌, 멀리 떨어져 있던 오랜 친구와 왕래 없던 동기 그리고 길 위의 점처럼 마주한 만남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여행길은 여행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남들에게 보여 준 트레드밀 위의 제자리걸음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어쩌면 지금이 길 위에 진짜 한걸음 내딛는 날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그날은 옵니다 (사진첩 어딘가에서)


오늘 새벽같이 다녀온 병원에서 시원한 결과를 얻지 못해 속상했습니다. 엄청나게 회복 탄력 좋은 긍정주의자인 내게도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수혈 중 부작용을 위해 맞는 스테로이드와 항히스타민이 혈관통을 주며 알려 주듯, 다시 살기 위해 이 고생을 한다는 현실로 이내 곧 제자리 찾아들지만 말입니다.


길고 긴 폭염과 열대야가 가고 가을장마가 찾아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한철 장맛비에 마음 젖지 말기로 해요.

고운 햇빛 받으며 웃을 예쁜 날 올 테니까요.

가야 할 것은 가고 다시 와야 할 것은 오는 법.

비가 오면 해도 나겠지요.


비를 예상할 수 없는 새벽하늘에 우산 들고나가 듯.

지금은 그저 우산을 챙기는 것.

그것이 당신과 내가 해야 할 분명한 일이지요.


어제오늘이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오 년이 되는

생각보다 길고 긴 터널의 끄트머리라 믿고 싶은 날.

하루살이의 힘겨움 앞에

무더위는 그냥 그런 이야기가 되고,

아직도 도와달라는 아우성은

터널 안의 메아리만 되는 그런 어떤 날이 추억이 되는 바로 그날.


우리 멋진 턱시도에 예쁜 드레스 입고 사진 찍기로 합시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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