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글을 쓰고 읽어요, 우리
함께 있어도 늘 보고픈 당신,
우리는 중학 동창이지요. 그 시절 함께한 추억은 없지만, 그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했다는 것만으로 묘한 인연의 신비를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 시절 풋풋한 이성에 대한 관심도 싹트던 그 시절, 3층 남자 반과 4층 여자 반을 오가던 편지와 선물들이 기억 속에 자랑삼아 남아 있었습니다.
여학생들 가정 시간 실습 다과들이 전해지고, 시커먼 남학생들 고백 편지가 올려지던 그 계단. 그 시절 우리들은 참 순수하고 풋풋했던 것 같습니다. 단골 레코드 가게에 대세의 유명곡이나 스테디한 올드팝송, 그리고 새로운 신곡들 까지 카세트테이프에 빼곡히 녹음해 선물하던 시절. 그 시절에 가장 만만한 선물은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특히 같은 의미의 문장이 변주되는 유안진 작가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같은 당시 베스트셀러는 중복된 선물에 책장에 여러 권의 꽂혀 있기도 했지요.
그러던 어떤 날, 어느 친구가 고등학생이었던 제게 선물한 시집 하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었습니다. 그때 마주한 생경한 표현의 묵직한 시언들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사회적인 눈이 처음 뜨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시집을 건네준 친구는 손윗 형제들의 영향으로, 광주에서 1980년을 겪은 집안의 내력으로, '시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 시어를 먼저 깨우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세월이 가고 점차 많이 연해지는 박노해의 글들을 조금 멀리하였다가 요즘 다시 마주해 봅니다. 여전히 제게는 좋았습니다. 말랑해진 말들에 시어를 쓰는 시인이 나이와 그것을 읽는 저의 나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시간과 생각이 더 엉키듯 들어 찬 눈과 마음을 그리는 말들.
미워해야 할 것을 제대로 미워하지 못하면
사랑해야 할 것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박노해 <걷는 독서>-
제대로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던 내 작은 주변머리를 다시 돌아봅니다. 그저 눈에 들고 세상의 그래프에 견주어 끼워 맞추려 버둥 대고 있습니다. 나이가 아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흔들대는 나뭇잎을 한동안 보았습니다. 늘 같은 모양새로 하늘거리는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한순간도 같은 적이 없군요. 나무가 흔들리는 바람결은 한결이더라도 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하나는 제각기였습니다. 이놈이 들썩이다 저놈이 설렁거리고 잠시 같이 너울대다 시치미 떼듯 숨죽이고.
흔들리는 마음과 휘청이는 삶은 이와 같이, 저마다 각자의 나름의 이유와 모습이 있겠지요. 내 맘도 내 일상도 이와 같을 듯싶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바라보기로 합니다. 잠시라도. 그러고 나서 잠시 글을 씁니다. 편지를 씁니다. 마음에 넘치는 것들을 말이 아닌 글로 쓴다는 것은 참 묘한 감정이 듭니다. 글은 쓰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그리는 것이니까요. 꾸준히 글 쓰는 사람은 누구든지 참 존경스럽습니다.
어느 날인가 한라산 입구에서 비를 맞으며 찍었던 사진을 찾았습니다. 그날, 무작정 제주로 홀로 떠난 어떤 날, 예정 없던 산행을 비가 막아서고 있었습니다.
나가려 하면 오고,
다시 나가려 하면 다시 오고,
또 나가려 하면 또 옵니다.
우산이 없는 처지의 당황은 잠시. 살면서 어려움이 우산 없는 비 오는 날만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잠시 쉬었다 개이면 가고,
아니면 젖어 버리고 일단 가고,
재수 좋으면 누군가 우산을 빌려 주겠지요.
잘 산 다는 것은
젖은 날, 마른날을 고마움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답니다. 그날들을 함께 마주해 주어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