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글어 가는 달빛에 감사
늘 고마운 당신,
큰 명절인 추석을 그저 그런 이벤트 없이 보냈습니다. 아무런 일이 없다는 것이 감사할 때가 있더군요. 조금 기운이 처지고 기분이 가라앉을 뿐, 갑작스러운 통증이나 변고 없이 휴일을 보낸 것 만으로 감사 가득한 날들이었습니다.
낮과 밤이 똑 같이 하루를 나누는 춘분을 넘어서자마자 신기하게도 하늘은 높고 구름 없고 부는 바람은 선하게 바뀌어 있더군요. 가을의 한가운데로 들어 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가을을 느끼기에도 아까운 시간에 연휴를 보내고 병원의 진료를 앞두고 기력이 점점 까무룩 해지더군요. 역시나. 새벽같이 찾아 간 병원 검사에서 모든 혈액 수치는 입원을 당장해도 이상할 것 없이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혈을 세 팩이나 하고 백혈구 촉진제도 맞고, 비타민과 항히스타민만 처방받은 채 항암제를 중단하기로 했지요. 두 번째 항암제도 실패에 가까운 예후가 지속되었으니 이제 마지막 항암제에 기대는 일만 남은 듯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연휴 전에 수혈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당신의 모습에서 미안함과 고마움이 밀려들었습니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누구 탓도 아닙니다. 그저 지금 그런 시간일 뿐입니다.
올해 추석에는 하늘에 두둥 떠있는 보름달을 찾아볼 생각도 못했지요. 몸상태도 상태지만, 병원 때문에 급하게 찾아든 도심 빌딩 속 작은 방에서 달을 찾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우리들 마음속의 둥근달을 그리며 서로의 간절한 소망에 두 손 모아 보았지요. 달은 그 손 모은 기도를 담아 다시 새로운 날로 숨어들었을 것입니다.
달은 해가 숨어들어야 보입니다.
해가 서쪽 바다로 깊게 숨어들어야 그때서야 달은 이미 동산 위에 부양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요.
일출은 해가 저 동쪽 바다 끝에서 빼꼼히 드러 낼 때부터 보이지만, 월출은 이미 동산 위에 떠 있어도 해가 숨어들기 전까지 알 수가 없더군요.
무엇이든 찬란하고 강렬하게 빛나는 것은
소박하고 은은하게 비추는 것을 가리는 것.
강하게 뿜어 대는 햇살의 기운으로 울긋 불긋대는 모든 빛깔을 눈에 담고 살았지만, 달빛이 비치어 주는 깊은 밤 걸음걸음만큼이나 고마울까요.
빛나지 않아도 고맙고 소중한 것은 있습니다. 다만 그 고마움, 소중함을 알아가기에 삶은 너무나도 짧습니다.
영글어 가는 것이 달빛뿐일까요.
일상에도 영글어 가는 은은한 빛을 기대해 봅니다.
모두 찬찬히 익어가는 날들을 꿈꾸어 봅니다. 그 익어간 날들이 우리의 시간이 되어 또다시 둥근달을 띄워 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