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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Oct 03. 2024

나의 모든 처음에게

처음은 마지막이 되고, 그 마지막은 처음을 낳아

사랑하는 어여쁜 아내 여니에게 06


늘 고마운 당신,

어느새 여름은 지난날이 되고 높고 푸른 가을을 느끼기도 아쉬운 날들입니다. 시간의 모퉁이에 이미 겨울이 와 있는 것은 아닌지 헷갈림이 올 정도로 서늘한 새벽을 마주합니다. 그 새벽에 테헤란로를 전세 놓은 듯 여유롭게 달리는 첫차 같이 텅 빈 버스를 타고 병원을 다녀왔지요. 모든 처음은 이내 곧 익숙한 시간으로 물들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으로 녹아듭니다.


이따금 사람들의 말을 흘리는 척 귀여겨들을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대화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이런저런 매체에서 쏟아지는 문장이 마음 한편에 남아 들 때가 있습니다. 요즘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낡은 영사기의 필름처럼
죽욱 스쳐 지나간다더군."


아직 죽을 때는 아닌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억과 추억의 복기는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요즘 들어 지난 시간의 어느 날이 선명하게 기억에 스며들 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비자발적인 백수에 기력 달려 무언가 열중할 수 없는 몸뚱이 때문이겠지요. 그러던 어떤 날 나의 모든 처음에 대해 빠져 들어 기억해 내 봅니다. 나의 처음은 어떤 처음이었을까요?


나의 첫 소풍.

유치원도 다니기 전이었어요. 사우디에 파견 나가  년에 한두  휴가를 나온 부친과 단둘이 소풍을 나섰습니다. 그때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와 형은  따라나서지 않았는지 알아낼 기억은 없지만, 아빠와 단둘이 나선 소풍길은 창경원이었습니다. , 지금의 창경궁에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동물원과 위락시설이 있었지요.


 창경원 코끼리 우리 앞의 벤치에서 아빠가 꺼내든  노란 종이에 기름 가득  통닭이었어요. 지금의 치킨 사랑이 그때 생긴 것일까요. 그날의 통닭, 그날의 흙냄새, 그날의 웃음은 파산  상경한 대가족 막내의  주인공이 되는 .   소풍은 그날의 아빠와 그날의 통닭을 가슴깊이 남겨 두었습니다.

닮았나요?


나의  미사 복사.

성당에서 11살에  영성체를 하자마자 복사가 되기로 했어요. 사제의 미사집전을 보좌하는 꼬마들의 세상은 제법 진지하고 엄격했습니다. 복사가 되기 위해선   동안 매일 새벽미사를 참석해야 하고 뜻도 제대로 새기기 힘든 기도문도 달달 외워내야 했지요.


그리고 서게   미사. 신부님과 입장하여 제대인사를 하는데, ''하고 제대에 박치기를 하고 말았지요. 신부님 눈썹은 위로 치켜 올려 매섭게 노려 보시고, 신자들은 키득키득. 당황스러워 다리까지 후들거리던 꼬마 복사의  미사. 그날의 마음이 지금의 나의 믿음이 되지 않았을까요. 경외의 마음, 공경하지만 두려워하는 마음. 나의 믿음.


나의  친구.

어릴  이사를 꽤나 많이 다녔습니다. 주민등록 초본을 떼어 보면 취학 이전에만 열일곱 번의 이사를 다녔다 나오더군요.  년에 서너  하는 이사에 어릴  친구의 기억이 없습니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해서도 국민학교 1학년에만  번의 전학. 좁은  북적이는 식구 덕에 친구를 집으로 부른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웠습니다.


그런 제게  친구는 파킨슨씨로 반쯤 누워 지내는 김봉술 여사였습니다. 할머니. 입에선  군내 같은 입냄새 가득했지만 하루종일 꼬마 녀석과 놀아 주던 봉술 할미. 싸우기도 제법 투닥거렸고, 시집살이 고된 모친의 가스라이팅에 끝까지 사랑으로 담아 두지 못했던 나의 할머니. 아랫목 보루 밑에  녹여 꺼내   엿이 생각나는 오늘입니다.   친구. 나의 할머니.


나의 첫 정치 참여


나의 처음을 되짚어 봅니다. 첫 책가방, 첫 자전거, 첫 공책들이 어렴풋 떠오릅니다. 사춘기적 첫 짝사랑, 첫 고백, 첫 거절도. 첫 월급, 첫 자동차, 첫 승진 등 나름 주류가 되고픈 미생의 날들도 말이지요. 얼마나 많은 처음이 나의 시간 속에 있었을까요. 전부 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너무 아쉬워마세요. 기억 속에 희미해진 많은 꿈들을 우리의 지친 마음으로 그 전부를 잡을 수는 없으니까요. 나의 처음에 함께 하지 못했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낡고 어두워진 마음으로 그 모두를 사랑할 순 없으니까요.


<어떤날>의 노랫말처럼 지나간 모든 것들을 아쉬워 않기로 합니다. 그저 화랑 모퉁이에 걸린 그림처럼, 달리는 버스 찻장 밖의 모습처럼 그냥 그대로 남아 있으면 되니까요. 이제는 그 처음들을 시간 뒤로 남기고 나의 모든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마지막이란 말에 너무 슬퍼마세요. 그저 햇살이 아프도록 따가운 날, 비가 끝도 없이 내려 축 처지는 날, 달리는 기차처럼 슬픈 날에도 처음이 있으면 마지막도 있을 테니까요.


사랑하는 당신,

나의 처음을 당신과 함께 하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마지막은 당신과 나눌 것이라는 것. 내 마지막 사랑으로 남아 주어 참 고마워요. 이 마무리 같은 마음이 삼십 년, 아니 오십 년 더 가기를 바랍니다.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치열하고 진지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의 모든 처음에게 부끄럽지 않게.


https://youtu.be/fwTb8-lsRTc?si=0XUH3BDaIGn-X2NM

어떤날 <너무 아쉬워 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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