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앞에서 기억을 더듬다
승민(엄태웅-이재훈)은 이제 자신만의 작품을 기대할 정도의 경력과 능력이 검증되어가는 건축사다. 사무실 동료와 비밀연애 후에 결혼을 계획하고 또 다른 도약을 위한 미국 출발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정말 ‘불현듯’ 대학 1학년 첫사랑이었던 서연(한가인-배수지)이 찾아 온다. 그녀는 쉽지 않았을 것만 같았던 결혼생활을 접고, 내일을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와병 중인 노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고향 제주도 집을 새로 짓고 싶어서 찾아 왔다. 승민은 서연의 집을 맡아 설계 및 공사를 진행한다. 한편으로는 길지도 깊지도 않을 것 같았던 첫사랑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서, 또 한편으로는 내 진심 가득한 아련함이 그저 짝사랑이었는지 풀리지 않을 궁금함을 가득 안고서 그렇게 집 짓기는 진행되어 간다. 결혼 날짜는 다가오고, 서연의 제주 집은 마무리되어 간다. 더듬거린 기억이 가슴 깊이 남은 추억이었을까? 내 고백 못한 첫사랑은 그녀도 알고 있었을까?
매운탕 같은 삶에 찾아 온 기억, 기억, 그리고 추억
승민과 서연이 제주의 집을 마무리하던 시점에 무심코 던진 승민의 날 선 한마디에 둘은 비행기를 놓치고 제주에 남게 된다. 제주 어느 바닷가 항구에서 둘은 소주 잔을 기울이며 서연의 힘든 날들에 대해 넋두리와 위로가 오고 간다. 그런 술자리에 이름 모를 매운탕이 내어진다. 서연이 말한다. 사는 게 매운탕 같다고, 그냥 매운탕 같다고,,, 다른 탕들은 갈비탕, 생태탕 등 들어 간 재료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는데 매운탕은 그저 매운맛만 남아 있는 그냥 매운탕이라고 말한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중요하지 않은 매운탕 같은 삶, 그런 삶을 지탱해 줄 무언가가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매운탕 안의 미더덕 같은 기억의 잔상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을 톡 터뜨리며 화들짝 놀랄 뜨거운 무언가를 쏘아대는 미더덕 같은, 크지 않지만 내 일상의 생각들 사이에서 톡 터뜨려 주는 기억들이 흔적들 말이다.
애써 기억을 떠 올릴 때도 있지만,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찾아 오는 기억의 습격도 이따금 경험하기 마련이다. 그 기억 중에는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추억도 있지만, 다시는 또 올리기 힘든 후회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런 기억들을 애써 평가하지 않는다. 그런 기억들이 놓치기 싫은 추억인지, 굳이 뿌리치고 싶은 후회거리인지 가름하지 않는다. 그저 찾아 드는 기억을 그저 그렇게 바라 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자의 가장 납득할 수 있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 집 앞……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현제명, 이은상 - 그 집 앞>
영화를 보는 내내 전람회의'기억의 습작' 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화의 배경이 되던 90년대 초중반에 대학생활을 하고, 그 시절에 전람회의 음악을 듣던 세대라 더욱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처럼, 영화는 내게도 기억을 끄집어 내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마무리되던 시점부터 머리 속에 스테레오 음향처럼 좌에서 우로 자꾸 흐르는 노래는 다른 노래였다. 바로 가곡 이었던 것이다.
중학교 3학년으로 기억되는 음악시간이었다. 교과서에 실린 현제명 작곡의 가곡을 배우던 어느 날이 머리에 떠 오르기 시작하였다. 인생에 영향을 끼친 스승들이 많지만 그중 중학교 사춘기 절정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모 음악 선생님의 시간이었다.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반 전체가 중창을 하던 그런 시간이었다. 갑자기 반주를 멈추고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하셨다.
“그 집 앞이 어떤 집이냐?”
불교의 선문답 같은 질문에, 시커먼 속의 열여섯 살 중학교 3학년 남학생들의 대답은 뻔하였다. ‘그 집 앞’은 바로 ‘그녀의 집 앞’이라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짝사랑하는 여학생의 집 앞이거나,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의 집 앞이라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그날 나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하였던 기억이 있다.
“내가 살던 집 앞이요.”
나의 대답은 막 던진 감도 없지 않았지만, 다소 복잡한 중의적 생각을 담아 이야기하였던 기억이다. 그리고, 그때 왜 그런 대답을 하였는지 제대로 기억해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그 후 25년을 살아 오면서 아주 가끔 그 질문과 대답을 떠올릴 때가 있으니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기억에 대한 자극을 줄 때도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살던 집이라는 것은, 내가 살던 그리운 고향집일 수도 있고, 현재의 집을 미래의 내가 기억하며 지나가는 집 앞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아련한 사랑을 하던 그 순간 내가 살던 집 앞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내게, 멀리 두고 온 고향집을 그리기에는 다소 작위적인 감이 있고, 미래의 나의 입장에서 바라 본 오늘의 나를 생각한다는 것도 그저 어렴풋한 성숙함의 과시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정말 잊지 않고 싶은 지난날들의 기억들을 담을 수 있는 바로 그 집, 그 집 앞을 지날 때라면 아마도,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되오며 그 자리에 다시 서지 않을까 싶어서였을 것이다.
내게 ‘그 집 앞’이란 바로 그런 집 앞이었다. 소중했던 추억이 머문 자리였던 것이다. 비록 그 추억 속의 첫사랑은 오늘 다시 갑자기 만난다 하더라도, 20년 전의 그 사람 그대로가 아닌 이상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일이다. 바로 내가 간직하고 아련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시절 그렇게 애틋했던 나의 마음과 나의 기억과 나의 바로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이다. 바로 그런 내가 살던 그 집 앞을 지나는 그런 느낌을 영화가 던져 주었다.
영화에서 물리적 공간인 집은 크게 세 가지 공간이 제시되었다. 서연이 부탁한 어린 시절 서연과 아버지의 공간인 ‘제주의 집’, 순대국밥을 팔며 억척같이 아들을 혼자 키워낸 승민과 어머니의 ‘대문 부서진 집’, 그리고 서연과 승민의 아지트처럼 오가며 감정을 키웠고 결국 엇갈린 첫눈 오는 날의 약속 장소가 된 ‘정릉 빈 한옥집’이다. 이처럼, 영화는 영화의 제호처럼 건축의 개론을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의 의미부여로 시작하여 그 공간에 담긴 기억을 이끌어 낸다. 그 세집은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한 그런 공간이고, 어쩌면 미래이기를 바랬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세 집이 모두 승민과 서연, 그리고 그들의 과거와 함께 호흡하는 나의 동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 집 앞’의 ‘그 집’ 일 수도 있다. 어릴 적 아빠와 키 재기하던 담벼락이 있고, 어릴 적 발자국이 남은 바로 그 집을 큰 변형 없이 유지하고픈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알량한 나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던 그 짝퉁 티셔츠를 아직도 입고 다니는 순대국밥 장사 엄마의 손때가 묻고, 나의 치기 어린 발길질의 흔적에 가슴이 저린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세 집들보다 서연이 간직한 승민의 첫 모컵(모델링)하우스의 모형이 그들이 가고 싶었던 ‘그 집 앞’ 일 수도 있다. 이 층 집에 창이 많고 마당이 있는 그런 집, 그런 집에서 함께 하고 싶은 미래가 바로 오늘이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항상 습작이다.
과거의 말과 행위, 사물들은 현재에서 반복되고 재발견되고 재생산되고 재진술된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재발견하고 과거와 오늘을 이어 놓고 싶은 것은 공간이다. 하지만, 집이라는 공간이 그저 공간적인 의미에서 머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바로 건축학개론의 수업의도처럼 건축이라는 공간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을 함축하는 개념을 담아 내야 진실된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업 첫 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주는 과제는 바로 ‘거리’에 대한 이해였을지도 모른다. 거리라는 것은 점과 점을 이어주는 시간과 공간이 함께 이해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 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기억이라는 반복되고 재발견되는 회상을 이야기의 구조로 만들어 낸다.
되돌려 받게 되는(현재) 것으로 이어지고 있는 플롯의 배열을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종국에는 과거의 끝과 현재의 끝이 으로 표상되는 매개에 의해 연결되면서 틈새를 봉합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플래시백이 없는 회상 장면으로 영화는 현재와 과거의 간극이 크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기억이라는 것이 과거의 행위가 아니라, 가장 현재적인 행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을 뒤로 하고서라도, 기억이라는 것은 완성작일 수 없고, 항상 습작으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승민이 기억하는 서연의 마지막은 ‘쌍년’이었던, 취기 중에 선배와 밤을 보낸, 바로 그 서연이었다. 서연이 기억하는 승민은 ‘꺼져버려’라고 앞뒤 설명 없는 독설을 내뿜던 우유부단한 승민이었다. 그런 그들은 건축이라는 매개로, 아니 다시 ‘건축학개론’이라는 매개로 지난 시간과 공간을 꺼내어 보고 다시 매만져 보는 것이 바로 기억의 역할이다.
자기가 사는 동네를 관찰하고, 가장 먼 곳까지 가 보고, 날씨 좋은 날에 어디서 잘 놀다 오라는 교수의 선문답 같은 과제에 대한 재반복을 현재에도 하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을 탐색하고, 먼 곳 제주에 가보고, 좋은 날 잔디밭에 누워 지난 그 기억들을 다시 되뇌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라는 것은 공간이라는 것 안에서 다시금 재 반복되고 재해석되는 것이다. 바로 기억이라는 습작의 매개로 인해서 말이다. 그처럼 기억은 항상 습작일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개념의 습작-> 모형-> 실제 집으로 이어지는 건축의 기술을 빌어 그 기억들을 완성하고 싶은 우리들의 바람을 대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가고 싶다.
영화 장면에 015B의 ‘신인류의 사랑’이 저 멀리 흘러 가고, 수입 병맥주로 후배를 꼬시는 ‘압서방파’ 오렌지 선배의 모습이 등장하고, 동네 독서실에서 죽 때리는 대입 재수생 친구의 추임새 같은 ‘졸라’가 대사에 가득 찬다. 어느새 자취를 감춘 CD플레이어가 등장하고, 펜티엄 컴퓨터의 위용이 설명이 되며, 작은 버스정류장에서 빌려준 어깨가 낯설지 않다. 그렇다. 그렇게 그 시절에 나의 기억들이 함께 있었던 것이었다.
한동안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 시절이 떠 올랐다. 어느 새부터인가 내게는 추억이라는 것이 사치일 정도로 변화 무쌍하고 힘들었던 20대의 기억들이 통째로 사라졌다고 허세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그 시절의 누군가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다, 그렇게 애틋함으로 삶을 지탱했던 순수했던 그날의 내가 보고 싶어졌다. 그런 그 시절의 나의 감정이 그리웠다. 그렇게 내게는 또 다른 기억이 습작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그렇게 오늘을 지탱해 주는 지난날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도 오늘을 살아 가는 사람들의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공간’ 인 ‘집’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건축학의 개론을 공부하는 교실에서 처음 만난 그와 그녀의 이야기이며, 아직도 그 시절 그 집에 살고 있는 나의 추억과 오늘에 대한 이야기이며, 지난 시절 그 집으로 돌아 가고 싶은 힘든 오늘날의 고백인 것이다.
오늘 같이 바람 선한 밤에 왠지 그곳에 가고 싶다. 내 기억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