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들을 막아라!!
(수요일 발행 예정이었으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헌적 계엄이 있었습니다. 여러 고민 끝에 포스팅합니다.)
좌파와 우파... 좌익, 우익... 아직도 낡은 개념이 사용된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좌파, 우파의 개념을 역사적 유래의 고찰이 없어도 우리는 사회에서 극단적인 표현으로 배우지 않았나 싶다. '좌빨', '수꼴'이라는 말이 익숙할 정도로, 역사에서 유래한 진영의 논리는 진화를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바꾸어서 새롭게 하자는 편과 현실을 지키자는 편의 나눔이었는데,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허울로 포장되어 현대사회의 균형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나 자신부터 이 진부한 표현을 그냥 쓰고 있으니 반성부터 해 본다.
또 심각한 오류는 좌파는 '사회주의ㆍ공산주의'이고 우파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연결하는 아집이다. 진짜 그럴까? 중국에서 지식인과 학자들은 '시진핑 시대'를 우파 정권이라고 규정한다. 마오쩌둥은 좌파의 혁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우파적인 수구적 1당 독재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니까. 북한의 김정은은 북한 내의 구성원 입장에서 좌파일까, 우파일까. 학술적 정의로 '우파 독재 정권'이 타당하다. '극장 국가'라는 선전 체제를 앞세워 대대로 세습하는 권력, 1800년대의 왕당파에 가깝고, 히틀러의 나치,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뭐 다 그럴듯하고 좋다만, 세상 사람 살이는 이쪽저쪽으로 부류를 나눌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하나의 의제와 하나의 사건, 그리고 하나의 이슈에 대한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사안마다 모두 같은 성향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무리수다. 사회는 실질적으로 좌와 우로 나뉜 것이 아니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누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처럼 재화와 권리, 정보의 유무에 따라 나뉠 뿐인 것이니까.
"러시아에서는 좀비 스탈린보다
뱀파이어 레닌이 더 낫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말의 속 뜻은 무엇일까. 소련 체제를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가두어 '좌빨'의 원류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러시아 유학 당시나 최근에 만난 러시아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수구적 우파의 스탈린 체제가 푸틴에 스며들었다고 말이다. 소련-러시아에 우파 정권이 있다고? 물음 가득하다면 여태 개념정리가 잘못된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무거운 이야기는 이쯤 하고 좌익, 우익에 대한 다소 흥미로운 이야기로 개념의 재정립에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라 하는 영화에 빗댄 정치 지형의 이야기다. 이것도 제법 오래된-2011년, 영어 기사였는데, 몸 글을 읽고 번역 요약, 각색한 후 공유한다.
https://www.cracked.com/article_19402_6-mind-blowing-ways-zombies-vampires-explain-america.html
영화에 대해 분석하는 것들 중, 가장 흥미로운 그래프가 있다. 바로 좀비 영화 대 흡혈귀 영화의 인기를 당시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원이었는지 민주당원이었는지에 따라 구분한다. 예외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공화당이 집권할 때는 좀비들이 대세이고, 민주당 집권시기에는 뱀파이어에 대한 것들이 집중 조명받는다. 보수를 좀비로 진보를 뱀파이어로 대의시켜 정치적 비판세력이 영화관을 점령한다는 의미다. 공화당 집권기에는 좀비를 호출해 경고하고, 반대로 민주당 집권 시에는 뱀파이어의 공포를 호출한다는 이야기다. 정설은 아니지만 제법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은 아래의 사례들로 확인할 수 있다.
닉슨 대통령(공화당) 시대에 그 유영한 좀비 영화 <살아 있는 시체의 밤(1968, Night of the Living Dead)>은 영화관마다 휘청대는 좀비들로 뒤덮었다. 카터 대통령(민주당) 때에는 드라큘라 영화 두 편이 각색되었다. 1980년대의 거대한 빨간 스파이크(돌연변이 바이러스-코로나 같은)는 그때 보수적인 슈퍼히어로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리메이크작과 속편, 두 편의 <돌아온 시체들의 밤> 시리즈 영화, 그리고 리애니메이터(일종의 프랑켄슈타인 류의 영화)가 영화관을 점령했다.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 당선은 대중들에게 앤 라이스(<뱀파이어의 연대기> 저자)을 선사했다. 영화사회학에서는 아직까지 이 연관성에 대하여 논문이 쓰이고 연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연관성은 얼토당토 한 유추는 아니고, 오히려 완벽하게 말이 된다는 생각이다. 공포는 시대의 사회적 불안감에서 비롯되는 1차 감정이다. 이념에 대한 판단과 추종을 떠나 좌파든 우파든 두려워하는 감정은 동일하다. 하지만 2차적으로 드는 감정은 사회적인 학습에 의해 작동한다. 그래서 두려움을 더 느끼는 대상이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일 수 있다.
뱀파이어는 좌파에 대한 우파에 있는 사람들의 두려움에 대한 모든 조합을 상징한다. 우파는 '지금 우리'를 지키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다. 이런 이유로 전통적인 도덕성과 성에 대한 붕괴, 종교에 대한 거부, 그리고 순진 무구한 사람들에 대한 유혹과 부패 같은 것들을 견제하고 걱정한다. 딸이 대학에 갈 때서야 엄마 아빠들이 두려워하게 되는 것들 말이다.
섹시한 뱀파이어라는 개념은 브람 스토커(아일랜드의 소설가, <드라큘라>)가 기본적으로 발명했다. 그전에는 뱀파이어는 그저 걸어 다니는 시체였다. 브람 스토커는 드라큘라를 통해, 뱀파이어를 새롭게 재창조했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지금의 좌파들, 진보의 운동가들이 도모하는 주제와 다르지 않았다. 얌전하고 예의 바른 영국 숙녀들은 드라큘라 백작에게 물린 후, 타락에 빠져든다. 모성 의무마저 저버리면서 원초적 욕구만 쫓는 과대망상적인 게으름뱅이가 되어 버린다.
전통적인 일부일처제 이성애 관계를 무너뜨리는 이야기는 버피부터 앤 라이스, 트와일라잇까지 뱀파이어의 전체 콘셉트가 되었다. 뱀파이어는 대체로 섹시하고 성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미드 <트루 블러드>에서는 시대를 반영한 듯, 동성애자와 양성애자인 뱀파이어들이 넘쳐 난다. 그럼에도 일반 대중들은 뱀파이어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감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보수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기독교인이 될 필요는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가진 보수적 이상은 브람 스토커 시대에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캠프파이어 이야기(모닥불에 모여들어 듣는 옛날이야기, 주로 무서운 이야기, 한국의 화롯불 이야기)와 문화 신화를 담고 뱀파이어의 현대적 화신을 만든 책으로 평가받는다. 이 이야기는 트란실바니아(지금의 루마니아 북서부)에서 온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는 유럽의 어느 마을 끝의 어둡고 외로운 성에서 은둔하다가, 서구 사회의 안락함을 즐기고 싶다고 결심하게 된다. 그는 영국에 이방인이자 이민자로 도착하자마자, 그는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종류의 괴물로 '변환시키기' 시작한다. 반 헬싱(뱀파이어 사냥꾼) 같은 영웅들이 실제로 행동을 취하도록 자극하는 것은 영국의 근본적인 가치 수호가 아닌, 물려 뱀파이어가 된 인간들이 영국이 아닌 드라큘라에게 적극적으로 충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득권이 아닌 이민자 출신 전복의 아이콘에게 충성하는 꼴을 보기 힘든 것이다.
어느 문화 평론가는 미국에서 이민 문제가 핫 버튼이 될 때마다 뱀파이어 영화가 등장(외계인 침공 영화와 함께)한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이민과 다문화 문제의 중요한 시대인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 지금도 회자되는 명작, 1989년의 <뱀파이어 키스> 같은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이 영화에서는 뱀파이어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와 아시아계 미국인들과 같은 모범적인 소수 민족으로 표현된 바 있다.
또한 뱀파이어는 영화 <블레이드> 등의 세계관처럼 그들만의 언어, 드라마 시리즈 <트루 블러드>처럼 그들만의 이상한 의식과 정부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 거의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지만 뱀파이어들은 '우리 편'이 아니다. 이방인들, 과장해 외계인들이나 다름없는 침입자들이다. 지금 주류의 미국인들, 트럼프 공화당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이민자들과 이민 세대에 대한 생각이 그러하다.
자유주의자에게 개인주의는
드라큘라에게 십자가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러시 림보-
미국의 보수의 아이콘이자 라디오 진행, 논객이었던 러시 림보의 말이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는 궤변이나 형용모순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요즘 '자유, 자유' 외치는 통치 세력들을 보니, 그저 무작위로 비유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자유'의 근간은 '개인의 완전한 자유'이겠지만, 지금 정권의 자유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이라는 단서가 필수가 되니까.
차별금지, 성소수자, 이민자, 그리고 집회 결사의 자유는, 마치 슈퍼맨에게 크립토나이트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이런 미국의 보수 논객은 뱀파이어의 비유를 좋아한다. 그는 종종 뱀파이어는 "자본주의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인 민주당원을 지칭하는 또 다른 단어일 뿐이라고 말했으니까.
2009년 뱀파이어 영화 <데이브레이커스>를 떠 올려 본다. 그 속에서 뱀파이어들은 세계를 장악하고 그들만의 사회와 정부를 세웠다. 하지만 더 이상 피를 흘릴 사람이 없어지면서, 사람들은 거리에서 굶주리기 시작했고, 가혹한 소련식 배급과 대량 뱀파이어 폭동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보수 논객 같은 사람들이 민주당이나 진보 정당이 연임에 성공한다면 현실화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바로 그런 종류의 암울한 디스토피아 지옥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좌파가 장악한 사회에서는 아무도 생산하지 않고, 모두가 이웃의 피를 빨아먹고 있을 뿐이니까. 무차별적인 복지 포퓰리즘이 곧 뱀파이어의 공포가 된다.
러시아 태생 소설가 앤 랜드의 애호가 토마스 시포스의 <뱀파이어 네이션>이라는 작품이 있다. 2012년에 영화로도 제작된 이 야기는 멀지 않은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려내고 있다. 인간과 뱀파이어는 공생하지만, 그들은 서로 여전히 믿지 못하고 반목한다. 작품은 뱀파이어와 좌파와의 관계를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커버에는 피를 마시는 레닌이 실려 있습니다).
뱀파이어가 선한 사람들로 그려지는 <트루 블러드>에서 조차, 그들은 위와 같은 선입견에 처해진다. 아무리 영웅 같은 존재일지라도 그들은 늘 보수주의자의 캐릭터들에게 사냥당하고 총구에 겨누어질 위험에 처한다.
이제 반대쪽을 살펴보자. 보수주의자들이 권력과 두각을 나타낼수록 사람들이 좀비 소설/영화/비디오 게임을 더 많이 구매하는 경향이 증가한다고 한다. 무엇 때문일까?
모기지 파동 위기 이후 좌파 논객 톰 하트만은 티파티 좀비들이 워싱턴에 자유롭게 살고 있으며, 그들의 비밀 임무는 미국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제2의 대공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예전 어릴 때 AFKN(주한미군방송)에서 하던 토요일 아침의 만화영화 악당일 경우 이치에 맞아 들어간다. 티파티는 오바마의 헬스 케어 혁신에 집단 반발을 하는 강경 보수주의자들을 상징하는 의미이니까.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은 보수적 경제이론을 좀비 경제학, '좀비 노믹스'라고 부른다. 좌파 진보주의자들은 대체로 보수 우파들을 생각보다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보수주의자들은 그저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며 자신들의 길을 가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신경하고 어리석은 집단이라 믿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무엇이든 소비하고 먹어치우는 존재들이기에 무섭다.
현재 좀비의 모습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과 그 속편의 감독인 조지 로메로에 의해 형상화되고 고착화되었다. 구체적으로, 시리즈 두 번째 영화 <시체들의 여명>을 통해 그의 피투성이의 공포 영화가 무분별하고 대량 소비주의에 대한 은유를 증폭시키겠다고 결심한 듯하다. 이는 <데드 라이징>이라는 컴퓨터 게임에서 쇼핑몰에서의 퀘스트로 구현되면서 은유에서 직유로 거듭난다.
비교적 소수인 뱀파이어와는 달리, 좀비는 항상 다수로 몰려다닌다. 생존자들이 한두 명의 좀비와 싸우는 영화는 좀처럼 본 적이 없다. 전체 서사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빨리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들은 그저 소비만 집중하고 있다. 그들은 엄청난 인간의 살점과 생각을 쇼핑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임무가 없어 보인다. 한국의 보수 압력 단체들을 보라. 어버이 부대, 태극기 부대 등 온통 집체적 집단으로 뜻을 주장하기 일쑤다.
최근의 작품들을 보면, 그 좀비화의 범인이 지목되곤 한다. 대체로 범인은 거대하고 사악한 기업, 영리 집단, 권력자들이다. 새로운 바이오 제품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좀비로 만드는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에는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방출된 더미(시험체)가 좀비로 거듭난다. <28일 후>에서는 어느 기업의 부도덕한 동물 실험 부서가 좀비들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영화 <부산행>도 마찬가지다.
로메로의 좀비 영화에서는 이점을 더 확실히 하는 표현들이 나온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즉시 자본주의의 유혹의 희생양이 된다. 그들은 탐욕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약탈하고, 한때는 강인했던 여성 캐릭터가 거울 앞에서 향수나 립스틱으로 자신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 장면에서 약탈자 남자들을 위해 요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 중 한 명이 좀비 무리를 보고 "그들은 우리야"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유명 미드 <워킹 데드>의 살아남은 자들 사이의 약탈과 전쟁이 다가오는 지점이 이 점을 잘 드러낸다.
보수주의자들은 이것이 좌파 엘리트주의의 징후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좌파 엘리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머리 없는 무리에게 둘러싸여 계몽된 최후의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자의식에 갇혀 있곤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진보정치인이라 호소하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민주당이 좌파이고 진보이던가? 언제부터? 금투세는? 가상자산조세는? 검찰개혁은?
좀비 개념의 중요한 부분은 좀비 종말론, 좀비에 의한 세상의 종말이다. <월드 워 Z>의 작가 맥스 브룩스가 지적했듯이, "다른 괴물들은 개개의 인간을 위협할 수 있지만, 살아있는 죽은 사람들은 전 인류를 위협한다... 좀비는 싹 쓸어 낼 수 있는 슬레이트 와이퍼이기 때문이다." 좀비들이 가진 유일한 목표는, 목표가 있다고 할 수 있다면, 세계적인 동화, 전 세계의 '좀비화'다.
좀비들이 왜 그냥 서로 공격하지 않는지 한 번이라도 궁금증을 품어보곤 하지 않았는가? 영화 <28일 후> (여기서 좀비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에서 이런 특징은 주요한 플롯이 되었다. 감염되지 않은 나머지 5명 정도의 인간을 추적하는 대신 서로의 살을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때문에 좀비들은 결국 굶어 죽고 만다. 모두를 좀비로 만드는 것은 개인의 생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 셈이다. 대한민국의 20%와 보수여당이라는 정치세력들의 유일한 목표다. 선거철 표를 던져 줄 좀비로 만드는 일. 최대한 많이.
좀비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떠돌이 누더기 생존자들은 '소수자 - 마이너리티'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좀비는 대체적으로 백인들로 표현되니까. 단지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1994년 아일랜드 밴드 '크랜베리'는 영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인기 있는 저항의 노래를 발표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제목이 당연히 '좀비'였다. 대체로 좀비물은 백인 우파의 미국 소비주의 문화가 세계를 장악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하고 있다. 당신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라틴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에스키모인이든 간에 좀비(미국의 천민자본주의)가 올 것이고, 곧 당신은 좀비들이 상징하는 살아있는 시체들이 되어 비문화적인 것들로 당신의 성격, 추향, 성향, 이념과 개인주의를 버릴지도 모른다.
세상을 집어삼키는 좀비들에 대한 영화를 볼 때, 진보적인 세대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님이 리클라인 소파에 기대어서 <동치미> <이, 만, 갑> 같은 것을 볼 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맥도널드와 스타벅스의 침공을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코스모, 페이스북, 저스틴 비버를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일률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좀비 기업들이 당신의 집에 들어와 뇌를 잠식할까 봐 두려워한다.
우파가 나타내는 위협의 일부는 순응에 대한 집단 집착이다. 가장 단순한 고정관념으로 요약하면, 보수주의자들은 빨간 넥타이를 맨 어두운 정장을 입고, 진보주의자들은 거칠고 언밸런스한 넥타이와 드레스를 입은 히피들이다. 보수와 종교를 결부시키는 것도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애국심이라고 보는 것도 그 한 가지다.
하지만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서라도 보수주의의 일부는 안정과 전통을 온 힘을 다해 고수한다. 이런 의미에서 '좀비 종말론'은 완벽하게 안정된 사회의 궁극적인 비전일지도 모른다. 좀비들은 사회개혁을 시도하거나 헌법 개정을 시도하지 않고 그저 어슬렁거리고 신음하며 무언가에 부딪힐 뿐이니까.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기독'이 '그리스도'의 한자식 음차임을 볼 때부터 뻔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종교의 핵심은 죽음에서 살아나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시작한 한 남자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각해 보면 좀비는 종교에 대한 전형적인 비종교적 비판이다. 좀비는 그래서 비판적 사고를 억제하고 묻지마 식의 복음주의를 강조하는 보수 기독교 진영에 대한 풍자다. 당신의 집 문 앞에 와서 초인종 눌러 성경 말씀 전하는 극렬한 복음주의자들 말이다. 그리고 광장에 알박기로 예배인지 집회인지
모를 태극기와 성조기를 쌍으로 흔드는 이들 말이다.
좌우의 구분은 불편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의 극한 대립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필요한 요소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단, 어느 낡은 개념서에서 외우듯 정리한 것들은 자칫 편협한 확증편향에 가두어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주의해야 한다.
앞에 소개한 내용들은 주로 '미국'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 한국의 정치는 그 미국의 민주주의에 동경심이 깊다. 그 동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이끌어 내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양당이 가위바위보 확률처럼 번갈아 정권을 잡을 때마다 정치뿐 아니라 사회의 전반이 반응하곤 한다. 영화로 예를 들었지만 대중문화도 그러하다. 분명한 것은 어느 세력이 집권을 하든지 대중, 민중은 늘 '고의적 비판자'로 날을 세운다는 것 아닐까 싶다. 그러니 좌파 집권 시에는 뱀파이어로, 우파 집권 시에는 좀비로 모여들며 민중의 마음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가장 공통적인 1차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한다. 이 두려움들이 가진 공통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특히 좀비와 뱀파이어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과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들 중 한 명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잘못된 신념에서, 조작된 사실에서, 오염된 뉴스에서, 비틀어진 역사교과서에서 어떤 실력자들이 '변환'을 도모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두려움.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할 것 없이 말이다.
정치를 대할 때 이것이 가장 무서운 개념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터무니없고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 비상식적인 것들의 관점은 어떻게든 전염성이 있다. 만약 그것에 노출된다면 우리가 좋든 싫든 그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될 수도 있다. 더 무서운 것은 뱀파이어도 좀비도 한번 변하고 나면 고칠 수 없다. 한번 바꾸어 회귀한 화신자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을 물리치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은 '파괴'뿐이다.
세상은 좌로 우로만 나뉘지 않는다. 적어도 위와 아래, 앞과 뒤가 아우러진 삼차원을 인지하며 산다. 우리 청년들 세대에게 부탁해 본다. 이미 가진 자들이, 저같이 낡아 버린 세대가 묶어 놓은 다이어그램을 부수고 새로운 삼차원 속의 역동적인 전자와 원자, 양자들이 되었으면 한다. 좌파이면 어떻고 우파이면 어떤가. 슈레딩거의 고양이처럼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아주 미미한 우주 속의 티끌 주제에 말이다.
낡은 영문 아티클을 옮기며, 우리에게도 이런 관점에서 영화를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 블로그는 스포 넘쳐나는 줄거리 요약집이 대세이고 영화 평론은 잘난 체 알듯 말 듯 재수 없는 자의식의 향연들이니까. 언젠가 조만간에 한국영화와 정치환경과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 쓰고 싶어 졌다. 아마 코미디, 공포 장르에 대한 고찰은 가끔 있었는데 파 보고 싶어졌다. 남은 기대여명의 시간이 내게 허락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