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니와 나누는 아침생각 20
1974년에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토론토 대학 교수 애너톨 래퍼포트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발표한다.타인을 상대로 행동하는 방식 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것은 협동, 상호성, 용서이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이나 조직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조직이나 집단을 만날 때 먼저 협동을 제안하고, 상호성의 원칙에 따라서 자기가 받은 만큼 남에게 주는 데에서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상대가 도움을 주면 이쪽에서도 도움을 주고 상대가 공격을 하면 똑같은 방식과 똑같은 강도로 반격을 가한다. 그러고 나서는 상대를 용서하고 다시 협동을 제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1979년에 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는 살아 있는 존재처럼 행동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을 가르는 일종의 토너먼트를 주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한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어느 프로그램이든 다른 프로그램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하위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버트 액설로드는 이 토너먼트에 관심을 가진 동료들로부터 14개의 프로그램 디스켓을 받았다. 각 프로그램에는 저마다의 행동 법칙이 있었다(행동 암호가 두개의 라인으로 된 가장 간단한 것부터 1백여 개의 라인으로 된 가장 복잡한 것까지).
승부는 어느 프로그램이 가장 많은 점수를 축적하는가로 판가름 나게 되어 잇었다. 어떤 프로그램들은 가능한 한 빨리 다른 프로그램에 접근하여 그 프로그램의 점수를 빼앗은 다음 상대를 갈아 치우는 것을 행동 규칙으로 삼았다. 또 어떤 프로그램들은 다른 프로그램들과 접촉을 피하고 혼자 해나가려고 애쓰면서 자기 점수를 지키는 쪽으로 나갔다. 그런가 하면 어떤 것들은 ‘남이 적대적으로 나오면 그만두라고 경고하고 벌을 가하는’ 방식이나 ‘협동하는 척하다가 기습적으로 배신하기’같은 방식을 행동 규칙으로 삼았다.
모든 프로그램이 다른 경쟁자들과 각각 2백 차례씩 대결을 벌였다. 그런데 다른 모든 프로그램을 이기고 승리를 거둔 것은 협동, 상호성, 용서를 행동 규칙으로삼은 애너톨 레퍼포트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사실은 협동,상호성, 용서의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들 속에 놓이게 되면 처음에는 공격적인 프로그램들을 상대로 점수를 잃지만,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다른 프로그램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웃한 프로그램들은 그 프로그램이 점수를 모으는 데 가장 효율적이라는 점을 깨닫고 마침내 똑같은 태도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장기적으로 보면 협동, 상호성, 용서의 원칙이 가장 이로운 행동방식임이 드러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직장 동료나 경재아자가 우리에게 어떤 모욕을 가할 경우 그것을 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같이 일하자고 그에게 계속 제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이 방식이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이것은 단지 선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이다. 컴퓨터 공학은 무엇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입증해 주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공공의 선, 공동의 선을 자본가가 주도하는 자유주의 계급에서는 마치 ‘전체주의’나 ‘사회주의’로 변곡 해석하기 마련이었습니다. 마치 ‘가난’이라는 것은 개인의 문제이며, 개인의 노력과 진정성이 결여된 징벌적 계급이라 단정하고 마는 것이라는 것입다. 그래서 그런지 소위 ‘부자’라는 가진 자들은 그 가난한 자들의 진정한 가난의 이유를 살피려 하지 않고 선뜻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 ‘가난’은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너희들’의 잘못일 뿐이고 나는 나 스스로가 열심히 살아 잘 사는 것이라는 논리인 것이지요. 그래서 ‘모두’가 잘살거나 ‘모두’가 적당히 가난하자는 분배정의는 ‘빨갱이’들의 불순한 의도일 뿐이라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대학 재학 시절 성당에서 중고등학생들 교리교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작 몇 살 많은 사람이 아이들에게 신의 말씀과 인간의 존엄에 대해 가르치려 들었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에 고3 아이들과 시골 수도원으로 피정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하기 위해 준비하며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프로그램이 ‘우리의 이익을 최대로’라는 팀플레이 경쟁 게임이었는데요.
짧은 설명을 하자면 홀수 조로 나누어 O, X 양자택일을 하게 하고, 그중 소수에게 점수를 몰아주는 그런 게임이었다. 중간중간 지점에 서로 합의하고 협의하는 소위 모두 O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단 그 협의는 꼭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게임이었습니다.
모든 경쟁이 그러하듯 아이들은 열성적으로 자신의 조가 이익을 얻어가도록 게임에 임했답니다. 마지막 라운드를 진행하고 순위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모두가 O를 내었을 때만큼의 이익 총량을 낼 수 없는 룰이 숨어 있었다는, 즉‘우리’, ‘이익’, ‘최대’라는 단어 중에 가장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우리’라는 개념이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우리’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경우 ‘우리 조’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약 ‘우리’를 여기 모인 ‘우리 모두’로 생각하였다면, 모든 라운드에 O를 제출하고 모두의 이익을 최대로 했을 것이다. 이 지점이 ‘공동선’의 문제인 것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부유하게 가진 자가 아닌 덜 가난한 사람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모든 현상에 외면하는 가진 자들도 문제이지만, 밖으로 티 내는 알량한 봉사활동과 나눔이라 볼 수 없는 의미 없는 적선으로 의무를 다한다 생각하는 이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정의가 훼손되고 파괴된 세상의 가치 틀 안에서의 정의는 절대로 불의하게 여기어 집니다. 그 불의를 인지도 못하고, 부끄럽다 생각도 못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도 혁명은 아직 필요하고 광장은 유효한지 모릅니다.
이는 공동 동등한의 이익이 최대의 효율을 가져다 준다는 도덕적이고 정성적인 행동율이 아닙니다.수학적으로 증명되며 과학적으로 가설설립이 가능한 진실인 것입니다.
나눔이란 포퓰리즘이 아니라 수학이고 과학입니다.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 힘든 시간이 깊어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늘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이 가난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는 필수이고 권리입니다.
곰탱이 처룽구리의 사랑하는 여니와 나누는 아침생각 2019_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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