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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의 몸부림과 영화읽기의 변화

극장소멸의 위기 (3)

by 박 스테파노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된 극장가의 풍경은 엔데믹 시대를 관통하며 많이 바뀌었다. 팬미팅을 위한 아이돌 포스터가 눈에 띄고, 필하모니 공연 실황, 스포츠 중계, 기업의 세미나로 다양한 대관 활동은 처절한 궁여지책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이런 극장가에 작년 2024년 여름부터 새로운 모습이 극장에 등장했다. 우선 관람료에 눈이 간다. 1천원, 3천원, 4천원의 가격에 눈을 고쳐 뜨고 살피게 된다. 그다음 런닝타임이 13분, 17분, 31분, 44분으로 영화인지 새로운 콘텐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낵 무비의 등장, 절반의 성공


'낵 무비'는 핑거푸드 스낵을 먹듯이 쉽게 선택해서 소비할 수 있는 영화의 새로운 양식이다. 그 첫 번째 주자가 <밤낚시>였다. 배우 손석구와 현대자동차가 협업한 <밤낚시>가 CGV상영관에 걸렸다. 상영시간은 13분이고 관람료는 1천원으로 책정된 이 짧은 콘텐츠는 예상 기간을 넘어 상영하여 4만 6천 여명의 관객을 모으며 성과를 내었다.


이는 릴스나 쇼츠 같이 짧은 콘텐츠에 노출되고 빨리감기로 영화, 드라마를 소비되는 새로운 관객층을 타깃한 실험적 마케팅이었다. 유의미한 숫자는 이 작품을 보러 온 관객의 1/5인 19%가 이 영화 관람 후 CGV의 다른 작품을 관람했다는 통계다. 소비 유도와 가망 고객 유입을 위한 일종의 미끼 전략 상품으로 입지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밤낚시>의 성공으로 CGV는 <집이 없어-악연의 시작>, <엠호텔>, <나야, 문희> 등의 스낵 무비들을 연이어 내어 놓으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스낵 무비 <밤낚시>, <나야, 문희>, <4분44초> (출처=씨네21, CGV, 롯데시네마>


롯데시네마나 매가박스도 스낵 무비를 기획하고 상영하기 시작했고, 영화가 아닌 유튜브 콘텐츠의 쇼츠 상영이나 엽편 작품의 옵니버스 등 새로운 기획들이 시도되고 있다. 4분 44초의 단편 여덟 편을 묶어 44분, 4천원에 상영한 <4분 44초>는 4만 6천 여명의 관객 중 60%가 1020 세대가 차지했다. 이들의 13%가 다른 영화를 찾아 젊은 세대를 극장으로, 스크린 앞으로 유인한 결과를 내었다.


극장가의 새로운 시도는 처절하지만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안방 OTT와 손안의 모바일에서 영화관으로 발길을 이끄는 노력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극장의 위기는 소비의 영역만 노력해서 타계할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공급의 측면에서 글로벌 OTT의 자본이 쥐꼬리만한 법인세를 내고 양질의 창작 자원들을 싹쓸이하고 있다. 오래된 배분율 문제를 현실화하고 멀티플렉스의 스크린 장악이 흥행의 조건이 되는 불공정의 개선이 제도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멀티플렉스의 등장도 영화산업의 커다란 혁명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그 해체와 파편화도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콘텐츠 소비자들에게 보다 의미있는 탐색과 감상이 가능할 여건 마련이 함께 되어야 한다.



영화, 드라마 탐색의 변화


영화 ‘리뷰어’는 비평가, 평론가와는 조금 다른 영역의 글쓰기와 말하기를 하는 부류다. 앞서 말한 트렌드의 변화가 긍정적인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리뷰어’가 생산해 내는 글과 말들이 ‘Breaking News(속보)’ 같은 단발성 소개는 지양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와 유튜브가 ‘클릭’을 유도하여 일종의 광고 수익을 올리는 ‘재테크의 기법’으로 변종이 되는 순간 영화의 리뷰는 광고 팸플릿이 되어야만 했다. 온통 ‘신작 뉴스’의 홍수였다. 이 피로감에서 벗어날 기회가 올 수도 있다.


이제 영화 리뷰어는 신작 소개보다 숨겨진 영화들을 찾아 소개하는 일이 주된 활동이 돼야 한다. 오동진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트래져 헌터’가 되어야 한다. 극장은 사라져서 집중되는 ‘히트작’의 의미가 유명무실해졌다. 반면에 OTT 플랫폼의 성장으로 너무나도 많은 작품이 쏟아지고 있다. 극장에 걸린 영화들은 찾아보지 않으면 밀려난다. 마치 글쓰기 플랫폼의 글들이 쓸려 나가듯이 말이다. 여기에 더해 ‘빨리 보기 세대’들이 콘텐츠 소비자의 주축으로 등장하면서, 그들의 고뇌인 ‘시간 가성비’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보완해 주어야 한다. 극장에 걸리든 OTT에만 나오든 상관없이 보물을 찾아 소개해야 한다.


작품성이 좋은 콘텐츠, 지금 시대에 의미 있는 콘텐츠, 남들은 모르는 오롯한 재미가 있는 콘텐츠를 발굴해서 자신의 글과 말로 전시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 시대 영화 리뷰어들의 생존 방법이자 책무가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극장에 막 개봉해 흥행하는 <하얼빈>, 넷플릭스의 <오징어게임>, 디즈니플러스의 <조명가게>를 이야기하거나, 조금 들어가 <다음 소희> 같은 작품을 주목할 때, 넷플릭스에서 리마스터링 해서 하는 <감각의 제국>, <러브레터>, <색, 계> 같은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리뷰어의 차별된 경쟁력이 된다.



영화, 드라마는 시대와 함께 읽어야


과도한 섹스 장면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여태껏 불멸의 영화로 남아 있는 것은 일본 내 군국주의적 정서를 다룬 오시마 나기사식 표현 방법, 그 시각 때문이다. 1930년대는 일본이 만주사변에서 중일 전쟁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특히 1936년이라면 중일 전쟁 한 해 전이다. 나라는 온통 징병의 군홧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의회와 정치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군부 권력이 점차 모든 것을 압박하던 시기였다. 일부 지식인들은 오히려 군부 권력에 편승해 광기의 프로파간다를 일삼았다. 이들은 언론과 학계를 장악하고 자신들의 권력욕을 확산시킬 계획을 차근차근 실현시켜 나갔다. 군부 자체도 통제파와 황제파가 대립해 피의 권력다툼을 벌였다. 황제파 중 일부 청년 위관 조직이 일으킨, 일명 5·15 사건 역시 1936년 벌어진 일이었다. 이 쿠데타는 무위로 끝났지만 이미 일본 군부는 정규군인 육군과 별개로 관동군(만주군)이라는 거대한 군사조직의 검은 야심이 일본과 전 세계에 위협적인 존재가 돼 버린 상태였다.

-중앙일보 <역사적 과오 인정 인색한 일본, ‘뉘른베르크 재판’ 보고 배워라> 칼럼 본문 중-


오사마 나기사 감독 <감각의 제국(1976)> (출처=한국영상자료원)


이 영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파격적인 내용과 충격적인 묘사에 깜짝 놀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 비평계는 물론 문화적인 측면에서 찬사를 받은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학적인 성애의 장면과 과도한 섹스 장면에만 중심을 두어 감상하는 일은 드물다. 영화로서 일본의 가장 아픈 부분이자 역사인 군국주의적 정서를 비판하고 있다. 일본의 반군국주의적 영화는 소심하다. 직설적인 저항과 비판은 드물다. 빙빙 둘러 이야기하거나 예술적 묘사로 사회에 만연한 정서에 대해 비판한다.


<감각의 제국>을 만든 오시마 나기사도 반파시즘에 대한 비판으로 당시 무기력했던 사회적인 통감을 표현했다고 한다. 일본은 이처럼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에 매우 인색하고 소극적이다. 독일의 통렬한 반성과 그로 인한 여러 영화나 소설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 지점이 지금 ‘한일 외교 문제’를 조망하는 또 다른 시각이 된다.


지금의 영화 소개는 이런 방향이어야 한다. <더 글로리>를 사람이 많이 보아서 ‘학폭에 대한 경종’을 떠 올린다는 이야기는 사실 시쳇말이다. 드라마 어디에 학교 폭력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있었던가? 어느 지점에서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가? 아니면 적어도 오시마 나기사식의 우회적이고 소극적인 몸부림이라도 있었을까? 그저 유행이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를 이야기해 보아야 한다. 진짜 학교 폭력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우아한 거짓말>, <한공주>, 그리고 <파수꾼> 같은 작품을 자신의 블로그에 내보이며, 지금의 세태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 <시네마 천국>의 한장면 (출처=미라맥스)


이런 세태가 비단 영화만의 트렌드는 아닐 것이다. ‘글쓰기’가 유행이라는 데 글쓰기는 어떤가? 글도 하나의 콘텐츠라 ‘소비’에 목적이 있다 보면 결국 대중의 니즈라는 것이 트렌드에 등치 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책이나 글의 가치는 세상의 사유와 가치 판단을 선도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사건들을 나열하여 ‘글쓰기 레이스’를 펼치는 일은 근시안적이고 소극적인 맥락 형성이다. 무릇 언론이고 정론이 되고자 한다면 과감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본연의 논조로 ‘주장’과 ‘논리’를 먼저 제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미디어 언론 곳곳에 숨어 있는 보물 같은 이야기와 토픽을 발굴하여 진정한 공론의 맥락을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영화를 좀 더 살펴보고, 함께 나누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글이 길어졌다. 아마도 영화리뷰에 대한 책을 퇴고하는 과정에서 이 방면의 에너지가 고갈된 것 같다. 좀 더 마음을 가다듬고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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