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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방관하는 자도 범인이다

합리화가 폭력을 부른다

by 박 스테파노
“문제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동일선상에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은 비폭력을 배경으로 하여 경험된다.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객관적인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관적으로 폭력이라고 지각할 때 바로 그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 슬라보이 지제크 <폭력이란 무엇인가> -


1.

지제크가 분류한 폭력은 주관적, 객관적으로 양분된다. 이 중 객관적 폭력을 다시 상징적, 구조적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주관적 폭력은 폭력을 저지르는 행위자가 식별할 수 있다. ‘누구’, ‘어떤 놈’으로 명확하게 지적이 되고 그를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폭력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 그리고 정치, 사회, 경제적인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구조적 폭력을 이야기한다.

슬라보 지제크 <폭력이란 무엇인가>


2.

존 도커 같은 사회학자는 폭력이 ‘비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 행동 고유의 특성’이라는 결론을 내었다. 개인 간의 살인이나 집단 간의 대량 학살은 인류사의 어느 시대나 발생했고 앞으로도 계속 재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유일신 신앙이 주된 주류로 자리 잡은 현대 종교의 영향으로 이야기한다. ‘신의 뜻’으로 모든 폭력을 객관화하고 마는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소수를 학대하고 학살하는 일은 고대 성경에서부터 지금의 현대 국지전까지 ‘명분’으로 포장되고 말았다.


3.

‘폭력은 안 된다'라는 도덕률은 흔한 구호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도, 그에 맞서 군비를 늘리는 바이든도, 그에 기승을 부려 핵무장을 주장하는 일본 보수 정치 세력들도 모두 그렇게 외친다. 폭력이 안 된다는 말은 어찌 보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사전 포석일지도 모른다. 이 말은 처음부터 역설을 쌍생아로 잉태하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폭력은 안 되고 폭력을 증오한다. 그래서 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응징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 응징의 방법은 당연하게도 다시 폭력이다.


4.

미국을 흔히 ‘폭력의 역사 위의 나라’라고 비판한다. 그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영화가 <투 다이 포>, <크래시>, <이스턴 프라미스> 등의 문제적 명작을 만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7)>다. 영화는 조용한 인디애나 시골 마을의 인심 좋은 식당 주인 톰(비고 모텐슨)의 일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톰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된다. 식당에서 행패를 부리던 일행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손님을 구하려다 톰은 그들을 무의식적인 전문가적인 폭력의 손길로 제압한다. 영웅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은 톰의 실체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 아들도 자신의 유전적 모습을 닮아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을 반복하게 되자. 결국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미국 건국의 상징인 필라델피아로 향해 그곳에 있던 자신의 ‘폭력의 기원’을 처단하기에 이른다. 역시나 끔찍한 폭력으로 폭력을 끊으려 한다. 이것이 ‘폭력의 역사’이고 그 역사는 계속 사슬 모양으로 되풀이되면서 진행될 뿐이었다.

영화 <폭력의 역사>


5.

주변의 사람들이 폭력에 관대할 때를 은연중에 느낄 때가 있다. 특히 ‘복수’에 대한 이야기는 참 관대하다. 나 역시 그 주변인들과 한 가지다. 심지어 동일한 ‘학교 폭력’의 양상도 자기모순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한다. 한 부류가 어떤 부류를 가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에 분노하는 일은 당연하다. 가해한 부류의 사회적 배경과 경제적 지위가 그들의 폭력을 가중했고, 사후의 처리도 그 사회적인 불평등이 작용하는 것에 더욱 분노한다. 반면 늘 ‘을’의 위치에 놓여 있는 청소년들이 가정에서 때리고 맞는 행위에 대해서는 그저 ‘가정 폭력’으로 분리해서 바라보고, 내 일이 아니니 혀를 끌끌하고 만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폭력의 양상은 늘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있다.


6.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국가폭력과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뺄 수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학술 활동과 미디어, 출판의 조명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런 역사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있고, 그 폭력에 둔감한 대중이 되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던 차에 매년 붉어지는 ‘학교 폭력’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물음을 던진다. ‘폭력은 무엇인가?’라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부터 ‘정의라고 여기는 것들도 폭력이 될 수 있는가?’라는 서로 다른 답을 낼 수 있는 다소 논쟁적인 물음까지 쏟아진다. 서로 다른 가치관 속에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폭력의 정의’는 무엇이 될지, 그렇다면 그 ‘폭력의 반대말’은 무엇인지 끊임없는 의문들이 생각의 많은 면적을 자리 잡았다.


7.

내가 위치한 곳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로를 건너 정반대 편으로 건너가야 알 수 있다. 그래서 ‘폭력의 반대말’을 꼭 찾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고되는 문헌을 읽고 그간의 영화, 드라마의 콘텐츠를 생각하다 보니 점점 어려움에 빠졌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대척점에는 권력이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말을 체득할 만큼 내 지적이고 학구적인 탐구력이 충만하지 않았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떠올리기도 하고, 어릴 적 성당에서 강조하던 평화라는 말도 찾아보았고, 지난 영화 리뷰와 비평에서 이야기한 용서라는 개념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폭력의 반대말이라고 확정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자료를 읽고 글을 쓰다가 반대말을 찾게 되었다. 폭력의 반대말은 ‘폭력’이었다.


8.

우리는 지금 폭력의 위기에 처해 있다. 어제의 법원 습격 폭동은 주관적 폭력이다. 그 폭도들이 기대는 준거의 객관적 폭력을 찾아야 근원을 해소할 수 있다. 작금의 객관적 폭력의 기인은 '권력'이다. 권력이 행사하는 공권력이 폭력의 다름 아니다. 약자들을 위한 입법은 물론 내란의 근본을 단죄하려는 특검마저 거부하는 이는 권한대행, 공권력의 대행이다. 여기에 객관적 폭력이 숨어 있다. 계엄 이후에도 구속된 이들이 없는 내각들은 어떤가? 구속된 내란 우두머리의 정책과 인사를 고집하며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경호처의 윤석열 추종세력과 그들의 구속을 막아 선 검찰도 다르지 않다.

1.19 새벽 참상 (연합뉴스)


9.

더 큰 잠재적 폭력은 침묵의 동조다. '아는 사람'이어서 '겪어 본 사람'이어서 '친구의 친구'라서 합리화의 침묵을 당연시 한다. 내란 우두머리에게 부역한 사람들을 그저 술한잔 해 보았더니 그냥 멀쩡한 사람이라며 관조적 동조를 던진다. 이런 인간들을 경계해야 한다. 폭력의 동조 세력일 뿐이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꺼내기 전에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면 느낄 수 있는 진실이 있는데, 자신의 이해관계로 스스로 채점해 세모로 남겨 두는 이들이 이 객관적 폭력의 공동정범이 아닐 수 없다.


10.

초면의 인연으로 얼마간 도움을 준 사람을 차단하고 관계를 끊었다. 지금의 내란 주동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준 작지 않은 금전을 빚으로 남기고 꼭 갚아낼 생각이다. 나를 도와준 사람이라고 그의 악행을 눈 감아 준다면 이 세상의 가해자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행한 만큼 꼭 책임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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