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실이 두려운 자는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지명에 대한 군소리
최근 우치다 다쓰루의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를 읽기 시작했다. 길 위의 철학자이자 장서가이며, 다독가이자 다필가인 그가 책 제목에 담은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첫 글이자 표제작인 짧은 에세이는 어느 지방 공공도서관 사서들의 연례 총회에서 행한 강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머리엔 규슈의 한 시립도서관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도서관은 ‘효율 개선’을 명분으로 민간에 위탁되었다. 위탁받은 운영자는 귀한 향토자료를 ‘효율’의 이름 아래 폐기하고, 자신이 보유하던 고서 재고로 서가를 채웠다. 대신 카페를 들이고, ‘고객 만족’을 위한 마케팅 기법을 적극 도입해 방문객 수는 두 배로 늘었다. 시정 담당자는 으쓱해졌고, 언론은 성공 사례로 들춰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도서관의 사회적 유용을 방문자 수, 대출권 수, 고객 만족도의 수치로만 환원하는 일이 정당할까?
민간 기업의 영역에서는 수치로 측정되는 효율 증대가 곧 이익이다. 그러나 문화의 영역에서는 그 외의 편익을 성실히 따져볼 의무가 있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만을 기준으로 삼는 일은 문화적 판단을 자칫 위태롭게 한다. 이미 사라진 향토자료는 수치로 환원할 수 없는 손실이다. 그 상실 앞에서 우치다 다쓰루는 다음과 같이 단호히 말한다.
“도서관은 보통의 ‘점포’와는 다른 공간입니다. ‘도서관 방문자 수가 두 배 늘었으니 도서관의 사회적 유용성이 두 배가 되었다’는 단순한 추론에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솔직히 말해서 도서관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우치다 다쓰루 지음 / 박동섭 옮김
책과 문화는 효용과 효율에 매몰되는 순간 본질을 잃는다. ‘쓸모 있음’에 대한 집착은 곧 존재 이유의 망실로 이어진다. 최근 문화체육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논란도 그 맥락에서 바라보게 된다. 예술계 인사들은 일제히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산업과 경영의 이름을 단 이들은 조심스레 낙관한다. 그 사이, 언론인과 정치적 가치 판단자들은 다소 어중간한 태도를 보인다.
공공의 역할은 간이역에 정차하는 완행열차와 닮았다. 단 한 사람의 통학을 위해서라도 완행열차는 그 역에 선다. 기관사는 이를 당연한 임무로 여기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정차를 반복한다. 학생이 타지 않는 날에도 마찬가지다. 이는 준공영제로 운영되는 한국의 대중교통 시스템과 유사하다. 타고 내리는 이의 수치가 효율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지하철이 무정차 통과하는 법은 없다. 노선버스, 마을버스 또한 빈 정류장이라도 서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문화와 예술도 그런 시선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치다 다쓰루는 “초월적인 것, 외부적인 것, 미지의 것을 어떤 장소에 불러오려면 그곳을 비워 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공실 없는 방, 공석 없이 판매된 항공권, 빈자리를 용납하지 않는 효율의 논리가 문화와 예술을 관장할 때, 우리는 ‘비움’의 의미조차 잃게 된다. 이는 곧 인문학적 리터러시에 대한 무지의 고백이다. 인문학의 문해력은 청소년이나 서민이 먼저 길러야 할 덕목이 아니라, 정치·행정의 고위직과 언론 종사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감각이다.
교회와 성당, 법당의 높은 천장과 텅 빈 공간은 왜 늘 차지 않는 걸까? 그 비움은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를 초대하기 위한, 고매한 의식의 형식이자 공간이다.
나 역시 우치다 다쓰루 식으로 말하고 싶다. 정책과 인사를 결정하는 누군가가 이 말을 우연히라도 듣길 바라는 작은 망상을 곁들여서. 산업이라는 이름 안에서 문화는 회전율 높은 상품이 되고, 대출 실적이 낮은 책은 시장에서 선호받지 않는, 존재의 이유 없는 ‘불량품’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알 턱이 없다. 인간이 책을 읽는 일이 어떤 체험인지, 음악을 나누는 일이 어떤 감각인지, 그림을 그리고 바라보는 일이 어떤 고요한 기쁨과 윤리를 지니는지를.
최근 인선으로 유추 가능한 것은 '네이버'와 이 정권의 관계다. 네이버 출신 기업인을 세 명째 고위 공직자 인선에 이름을 올렸다. 문화체육부관광라는 이름에는 관광은 겨우 끼어 들었으나, 최근까지 관광 산업 종사한 기업인을 장관으로 임명하며 'K컬처 300조'시대를 말한다.
그저 웃긴다. 통신사 기자로 시작해서 야후, 네이버에서 대언론 담당하다가 트래블 플랫폼 스타트업 창업 후 '놀'에 합류한 CEO출신. 그를 'IT와 플랫폼 전문가'라 말한다. 대관업무와 숙박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에 기술적 전문성이 어디에 있는지? 이 밖에 그의 출신에는 두 가지의 물음표가 있다. 기자 출신 포털 기업을 통해 입지를 다진 자. 그리고 숙박업소 '야놀자'.
'놀'은 이전 '야놀자'가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새로 입은 옷이다. 2005년, 야놀자는 ‘대실 가능한 모텔 정보를 알려주는’ 아주 작은 서비스로 시작했다. 초기 이름은 <야! 놀자>였으며, 사실상 대학생, 연인, 야간 유흥객 등을 주요 타겟으로 한 ‘모텔 탐색 도우미’에 가까웠다. 거리 근처의 ‘모텔 어디가 괜찮냐’는 질문에 즉각 응답하는, 말하자면 비공식적 욕망의 지도였다.
그러나 이 시작점은 단지 사업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야놀자 플랫폼의 윤리적 지형을 암시한다. 즉, 도시의 그림자, 감춰진 시간, 관계의 주변성에서 태동한 서비스라는 사실이다. 대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감춰지고 은폐된 ‘접속의 시간’을 의미하며, 이는 야놀자가 기술적으로 추구하는 ‘비대면, 비정서적, 감각 최소화’의 논리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런 태생적 구조는 야놀자가 이후 숙박, 레저, 여행, ERP 시스템으로 확장하면서도 단절되지 않은 채 내부화되었다. 다만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오히려 기업의 브랜딩은 그 출발을 지우고, ‘모텔의 대실 정보’라는 사회적 낙인을 덜어내기 위해 기업 이미지를 고급화하고 탈감각화한다. 이 전략은 시장 논리에서는 유효하지만, 사회적 책임과 문화적 기억의 차원에서는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야놀자의 현재 브랜딩은 글로벌 OTA(Online Travel Agency), 클라우드 기반 숙박 ERP 솔루션, 스마트 관광 인프라 등으로 진화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여전히 ‘모텔의 시간성’과 ‘비정규 접속성’이라는 DNA가 흐르고 있다. 무엇보다, 시스템화된 ‘비인간적 정돈’, 즉 누군가와의 접촉 없이 방을 예약하고, 머물고, 떠나는 일련의 절차는 모텔 대실의 무언적 코드와 닮아 있다. 거기에는 관계도, 응시도, 맥락도 없다. 단절된 접속과 감정 없는 소비만이 남는다.
플랫폼이 이를 지워버린 채 스스로를 ‘여행과 기술의 결합’으로 포장하는 것은 태생의 망각이며, 이는 도시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익명 노동과 감정 노동의 지움과도 직결된다. 야놀자가 어떤 기업으로 성장하든, 그 탄생지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는 일은 사회와 사용자의 몫이다.
이런 기업을 주도했던 인물이 한 국가의 문화정책을 이끌어 간다고? 물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야놀자’는 단순한 숙박 예약 플랫폼이 아니라, 숙박업 전반의 디지털 인프라를 장악해가는 플랫폼 자본의 전형이다. 모텔·호텔부터 레저·레스토랑, 여행 콘텐츠까지 그들의 알고리즘은 ‘취향’과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사용자의 욕망을 표준화하며, 이질성과 우연을 제거한 ‘예약 가능한 일상’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플랫폼의 미덕은 오히려 인간 감각의 축소와 ‘관계’의 소거를 초래한다. ‘누가’ 방을 청소하고, ‘누가’ 프런트를 지키며, ‘누가’ 시트를 바꾸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사용자에게는 오직 가격, 위치, 평점, 그리고 사진 속 정갈한 이미지만이 중요하다. 이 감각의 비인격화는 노동의 가치를 지우고, 장소의 온기를 지운다. 플랫폼은 오직 예약과 결제, 리뷰로만 존재를 인정한다. 삶은 삭제되고, 사용성만이 남는다.
문화도 이렇게 되어 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깊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K컬처의 정수라 극찬하는 얄팍한 인지, 인식과 다름없다. 그저 트렌디하게 성행하면 되는 것이 문화인가? 싸이의 '강남 스타일'은 코엑스 앞의 기형적인 조형물만 남겼다. 우리 문학은? 영화는? 연극은? 클래식은? 미술은? 그리고 미학적 탐구는?
야놀자가 제공하는 것은 ‘편리함’이지만, 그 편리함은 누군가의 투명한 노동 위에 세워진다. 야놀자가 자랑하는 ‘자동화’, ‘무인 키오스크’, ‘비대면 체크인’은 숙박노동의 필연적 불안정성과 탈노동화를 부추긴다. 특히, 객실 청소나 위생 관리는 여전히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함에도, 그 노동은 ‘야놀자’라는 브랜드 이미지 뒤에 철저히 가려진다.
이는 단순한 고용 문제를 넘어, 노동의 익명화라는 윤리적 문제로 이어진다. ‘서비스업’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는 플랫폼 뒤에서 저임금과 시간제, 외주화의 굴레 속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들의 존엄은 단 한 줄의 리뷰로 평가되고, 쉽게 삭제된다. 인간의 노동은 데이터화되고, 별점으로 환원된다. 이 별점 체계는 노동자의 성실성과 사용자의 기분을 혼동하며,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감정의 억압을 요구한다.
효율이 개입되면 안 되는 분야 중 첫 번째가 문화다. 기업인이나 기업, 2 섹터는 후원에 그쳐야 문화가 산다. 문화를 산업의 문법으로 해석하는 순간 메타포와 상징은 사라진다. 이런 의미에서 지명자가 플랫폼에서 강조한 '리뷰 비즈니스'의 성공담은 더욱 경계해야 한다.
리뷰는 플랫폼 경제의 ‘신뢰 장치’로 작동하지만, 동시에 감정의 일방적 분출 통로가 된다. 소비자는 마치 익명의 심판자처럼 ‘불친절했다’, ‘냄새났다’, ‘침대가 마음에 안 들었다’는 식의 평가를 남긴다. 그러나 그러한 문장은 언제나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내포한다. 리뷰는 소통이 아니며, 재조정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자 삭제 불가능한 기록이다.
야놀자와 같은 플랫폼은 이러한 감정의 흐름을 ‘데이터’로 수집하고, 다시 상품화하여 숙박업체의 점수와 노출 순위를 조정한다. 감정은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수익의 척도로 환산된다. 이 구조는 감정의 비윤리적 사용이며, 플랫폼 기업의 무형 착취라 할 수 있다.
야놀자의 확장 전략은 ‘여행의 로컬리티’를 파괴한다. 지역의 이름, 풍경, 사람들은 숙박 예약과 레저 결합 상품으로 소비되며, 여행은 독창적 경험이 아닌 패키지화된 소비 활동으로 전락한다. 숙박업소는 ‘지역 문화의 일부분’이 아닌 ‘별점 경제의 경쟁 단위’로 전환되고, 동일한 UI와 리뷰 시스템 속에서 아무 데나 같아진다. 이러한 디지털 동질화는 오히려 여행의 본질을 훼손하며, 사용자에게도 ‘관계의 감각’을 잃게 한다.
야놀자는 기술 혁신과 디지털 효율화를 내세우며 ‘접속 가능한 삶’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감정의 상품화, 노동의 익명화, 지역성의 파괴라는 심각한 윤리적 공백이 놓여 있다. 우리는 이 플랫폼이 제공하는 ‘편리함’을 기꺼이 소비하면서도, 그로 인해 지워지는 수많은 얼굴과 이야기, 감각의 미세한 흔들림들을 망각한다.
이 정부 인선에 인사이트 부족한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