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묵상 08
제법 치우친 정치적 지향 덕에 타임라인에는 탄핵심판에 지친 사람들과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온라인에 가득이다. 인상평에 준하는 다채로운 감정들을 쏟아 내고 있다. 물론 나 자신도 틈틈이 생각을 적어 드라마가 완결할 시점에 비천한 리뷰를 적어 내리려 한다. 사람들의 인상평에, 내 메모에, 그리고 치우친 뉴스가 되어 버린 SNS담벼락에는 공통된 양태가 발견된다. 바로 '고달픔'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고달픔이 특별한 도전과 극복의 과제가 되고 성취의 후일담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저마다에게는 고달픔이란 시계밥 주지 않아도 째깍째깍 좇아 오는 시간들이다. 많은 사람들, 아직 어리숙한 사람들은 망각하며 산다. 인생이란 커다란 과대망상을 이 부침 가득한 고달픈 하루가 지탱한다는 것을. 드라마, 영화, 소설의 환기가 이 망각을 제대로 터뜨릴 때가 있는데, <폭싹 속았수다>가 그런 이야기라 생각된다.
드라마 이야기를 하며 온갖 코드를 들먹여 해석하는 사람들도 여전하다. 특히 여성에 대한 서사라며 F코드를 앞세운 이야기들은 유행을 지난 듯해도 여전스럽다. 잘못된 해석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조금 식상하고 진부할 뿐. 이런 사회적 함의의 코드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힘들다는 데 있다. 이런 사람들을 '결여의 인간'이라 생각한다. 가치 소중한 무엇이 결여되어 자신에 투영하기 앞서 타자화하여 평가하고 채점하는 것이 사는 방편이 되는. 얼마 전의 나의 모습 말이다.
삶이 고달픈 이유는 있을 것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다. 물질과 재화의 결여는 가난과 궁핍을 부르고, 정의와 양심의 결여는 혼란과 재난을 부르곤 한다. 교부들의 윤리신학에서 선의 결여는 곧 악이라고도 했다. 선과 악이 대립자적 개념이 아니라 선이 없는 것이 악의 상태라는 이야기다. 선이라는 말을 한글로 옮긴다면 '좋은 것'이 되는데, 좋은 상태가 사라진 상태는 곧 나쁜 상태가 되듯이 결여는 상심과 좌절의 근원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결여된 채로 살아간다. 신이 아닌 이유다. 이 결여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흔히 '취득'을 지향하는데 이는 밑돌을 빼어 웃돌을 삼는 이치다. 결여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환'이다. 결여의 교환을 사랑이라 말하는 문학평론가의 이야기가 스며드는 이유다. 고달픔이라는 결여를 해소할 방법은 물질, 재화의 복구와 취득이 아닌 서로의 결여를 맞바꾸어 채우는 일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이런 결여를 서로 채우려 애쓰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도 무언가를 채우고 있으니까.
고달픈 일상을 그리는 드라마는 거대한 사건 없이도 우리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든다. 최근 몇 해 동안 그런 작품들을 제법 만났다. 비슷한 듯 다른 제주 이야기 <우리들의 블루스>, 승자는 한 명도 없지만 해방감을 맞는 <나의 해방일지>, 그리고 최고의 반전 드라마라 생각하는 <눈이 부시게>.
특히 6년 전 오늘 종영된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참 힘든 이야기다. 드라마는 힘든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이다. 젊어서 힘들고, 나이 들어 힘들고, 덜 가져서 힘들고, 더 가지려고 힘들고, 어제는 후회 가득해서 힘들고, 내일은 불안해서 힘들다. 우리들의 애써 누운 잠자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모두의 하루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에도 똑같아도 우리는 살아 낸다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시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 끝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주인공 김혜자가 말한다. 오늘을 눈이 부시게 살아가라고, 당신은 그럴 자격 있다고 말이다. 세상 시끄러운 일들에, 각자의 남모를 곤란에, 말할 수 없는 비루함이 가득할지라도 그저 살아 낸다면, 언젠가 그 결여된 시간을 고스란히 채워줄 진짜 사랑의 순간들이 찾아올 것이니까.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말라.
오늘을 살아가라.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jtbc드라마 <눈이 부시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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