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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된 진실과 다층적 정체성의 미로

[리뷰] 영화 <추락의 해부>

by 박 스테파노

은 사실의 조각 모음이 아니다


사고가 사건이 될 때 진실은 조각 조각 파편이 된 채로 마주하곤 한다. 사고는 복구라는 처리 과정으로 마무리되지만 사건은 완전 복구될 수 없는 해석으로 남는다. 이 해석의 과정은 사실들로 조각난 진실의 증거를 모아 서로 꿰어 맞추는 일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맞추어진 사실의 모음은 완벽한 진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이런 태생적인 불완의 결론을 내리는 곳이 법정이다. 법정 드라마는 이런 진실의 재구성, 재현에 대한 한계를 일깨우곤 한다.


한계와 맞닥뜨리는 순간 인간은 여러 양태로 반응한다. 권위의 압력에 순응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영화 <추락의 해부>는 순응보다 질문을 던진다. 묻는다는 것은 건너는 일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는 일이다. 건너는 일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주저함을 주곤 한다. 그래서 좀처럼 질문하지 않는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만이 사건을 제대로 해석해 진실의 근처라도 도달할 용기를 얻는다.


영화 <추락의 해부(Anatomy of a Fall)>는 단순한 법정 드라마를 넘어, 인간 내면의 분열과 가족 간 얽힌 상처, 그리고 기억과 언어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감독 쥐스틴 트리에(Justine Triet)는 지난 작품들에서 이미 보여준 인간 심리의 복잡성과 정체성의 모호함에 대한 탐구를 이번 영화에서도 심화시켰다.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는 사건의 표피 너머에 숨겨진 본질, 즉 ‘추락’이라는 비극적 사건의 내면적 해부를 경험한다.


<추락의 해부> 공식 포스터. 출처=그린나라미디어



진실은 시간과 함께 휘발된다


영화의 중심에는 한 남편의 추락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추락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각각의 과거와 내면에서 치열하게 싸워온 갈등, 상처, 그리고 희생의 누적된 결과물로서 드러난다. 드라(산드라 휠러)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이유는 여러 정황들인데 그 정황들은 지난 시간의 누적된 갈등의 국면들이다. 반면 산드라 측 변호는 남편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은 평생 자신이 피해자였음을 자처하며, 늘 타인에게 양보하고 희생해 왔다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의 내면에는 끊임없는 피해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러한 감정은 결국 그가 스스로 자신의 추락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전락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영화에서 남편이 "나는 언제나 피해자였다"라는 녹취가 재판 장면에서 흘러나올 때, 관객은 그의 자기합리화와 내면의 분열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직감만으로 사건, 사고 당시의 명확한 진실을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시간이 개입했으며 편견의 작동으로 정황은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영화 <추락의 해부>의 진정한 매력은 단순한 개인 비극에 머무르지 않는다. 감독은 남편의 추락사를 둘러싼 가족 구성원들의 과거—아들의 실명, 아내의 외도, 아내와의 표절 시비 그리고 집필의 실패 등—를 섬세하게 엮어내면서, 각 사건들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진실의 파편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한다. 재판의 심리는 추락사가 아닌 사뮈엘과 산드라, 그리고 다니엘의 복잡한 가정의 내력을 쫓아 가는 것으로 방향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단순한 법정 스릴러를 탈피해 진실의 해부를 다룬다. 사진=그린나라미디어


법정에서는 검증 불가능한 정보와 증언들이 서로 충돌하며, 단 하나의 ‘통합된 진실’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진실의 파편들은 마치 해부학적 절개를 통해 드러난 신체의 조직들처럼, 각자의 이야기를 저마다어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다. 제목이 검시(Autopsy)가 아닌 해부학(Anatomy)라고 명명되었는지 다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도 추락(Fall)의 해부다. 죽음의 해부가 아닌.


검시 '부검(Autopsy)'은 단순히 사체를 분석하는 과정이지만, '해부학(Anatomy)'은 더 넓은 의미에서 사건, 관계, 심리를 해체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추락’은 신체적 추락뿐만 아니라, 관계와 감정의 몰락까지 포함하며, 제목은 이를 해부하는 상징적인 개념이다. 법정에서 진실이 조각조각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 자체가 ‘추락의 해부’다. 문학적·철학적으로 보면, 해부학(Anatomy)은 단순한 사건 분석이 아니라, 인간관계와 감정의 해체 및 탐구 과정을 의미한다.


특히 영화 후반,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의 마지막 법정 발언은 이 모든 미로 같은 서사의 정점을 장식한다. 그가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생각하라"라고 또박 또박 말할 때, 단순히 사건의 기계적 재현에 머무는 법정 논리에 대한 반문뿐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이 그때그때의 당사자가 체험한 근원적 동기와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것임을 일깨운다. 다니엘의 이 발언은 법정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정보의 부족과 왜곡된 증언이 만들어내는 한계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시간의 흐름과 언어의 오염 속에서 재현될 수 없는 ‘완전한 진실’을 향한 인간의 무력감을 드러낸다.



다층적 정체성이 만든 진실의 미로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바로 주인공 산드라의 정체성 문제다. 독일인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거주하며 영어를 주언어로 사용하는 그녀의 설정은 단순한 배경 장식이 아니다. 또한 양성애자로 성적 취향 또한 남다르다. 산드라는 여러 문화적 요소가 뒤섞인 정체성의 산물로, 어느 한 사회나 언어에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경계의 인물이다.


이러한 그녀의 위치는 가족 내 갈등과 개인의 고립감을 극대화하며, 동시에 진실의 다층성과 상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산드라의 언어적 혼종성은 법정 드라마 속에서 소통의 불확실성과 진실 재현의 어려움을 은유하는 역할을 하며, 그녀 스스로도 “나의 목소리가 진실을 말하는가?”라는 내면의 질문에 시달린다.


이처럼 영화는 ‘추락’이라는 단일 사건을 넘어서, 가족이라는 하나의 집단 내에서 이루어지는 복합적 상호작용과 심리적 해체 과정을 면밀하게 그려낸다. 남편의 추락은 단순한 신체적 사고가 아니라, 그동안 쌓여온 상처와 억눌린 감정이 분출되는 결과물이자, 동시에 각 인물이 지닌 내면의 ‘진실’이 드러나는 하나의 거울이다. 감독은 이를 통해 완전한 진실이란 결코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존재할 수 없음을, 여러 층위에서 서로 엇갈리는 기억과 증언 속에서 암시한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이전 작품들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 주제, 즉 정체성의 혼란, 기억의 불완전성, 그리고 인간관계 속에서의 상처와 갈등은 이번 영화에서도 더욱 성숙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빅토리아(In Bed with Victoria)>에서 보였던 개인의 내면적 갈등과 사회적 역할의 모순은 <추락의 해부>에서 더욱 복잡하고 다면적인 가족 내 서사로 확장된다. 감독은 이전 작품들에서처럼, 인물들의 심리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을 통해, 진실이라는 것이 단순한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과 감정의 결합체임을 끊임없이 질문한다.


다니엘의 보호자이자 사건의 목격자 '스눕'. 사진=그린나라미디어


또한 두 작품 모두 '개'가 주요한 등장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도 유의미하다. 코미디 <빅토리아>에서 개는 유일한 목격자이자 기존 인간 사회에 대한 풍자 매개였는데, <추락의 해부>에서 개 '스눕'은 단순한 반려동물을 넘어, 작품 전체의 미묘한 상징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스눕'이라는 이름 자체가 ‘염탐하다’는 의미를 내포하듯, 이 개는 가족의 내밀한 진실과 감춰진 갈등을 은유적으로 파헤치는 존재다. 특히, 다니엘과의 관계를 통해 스눕은 그의 무너져가는 시각과 감정, 그리고 진실을 향한 갈망을 상징하며, 관객에게도 무심한 듯 진실을 염탐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법정이라는 무대에서 스눕은 증거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편견과 아픔 속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이처럼 스눕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내러티브에 도전하며, 결국 독자적 시선으로 사건의 본질을 조명하게 만드는 문학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진실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가 아닌 '왜'가 되어야


영화 속 대사와 장면들은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법정에서 변호인 뱅상(스완 아를로)이 "우리는 증거가 아닌, 기억의 파편을 마주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어조에는 단순한 법의학적 분석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완전함에 대한 철학적 고뇌가 묻어난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남편이 아들에게 유언을 남기듯 당부의 말을 하는데, 이는 그가 스스로의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몸을 맡긴 채 자기 파괴적 선택을 정당화하는 심리를 담아낸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영화가 단순히 사건의 논리적 연결고리를 제시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사건을 둘러싼 ‘왜’를 묻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정보의 부족과 증언의 왜곡 속에서, 재판이라는 제도는 결국 ‘어떻게’가 아닌 ‘왜’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무엘의 발언은, 우리에게 진실에 도달하는 방법론의 한계를 일깨운다.


'어떻게'가 아닌 '왜'를 물어야 한다는 다니엘. 사진=그린나라미디어


이는 곧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재판과 사법 제도가 당면한 한계—즉, 완전한 진실의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문제—를 암시하며, 동시에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진실을 모색해야 한다는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더 나아가, 영화는 법정이라는 공적인 장면과, 개인의 내면적 고통이 드러나는 사적 순간을 교차 편집함으로써, 진실이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 그리고 정체성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유동적인 개념임을 설파한다. 과거의 아들 실명, 아내의 외도, 집필 실패 등 가족 내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한 정황 증거가 아니라, 각 인물들이 지닌 내면의 상처와 그들이 만들어낸 서사의 파편들이다. 이러한 파편들은 마치 해부된 신체 조직처럼, 서로 다르게 배열되고 재조합되지만, 그 과정에서 원래의 ‘통합된 진실’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잔해로 남는다.



진실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재현 불가능하다


결국 <추락의 해부>는 한 가족의 붕괴와 한 개인의 자멸을 통해, 우리가 직면한 진실의 상대성과 재현 불가능성을 문학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작품이다. 감독 쥐스틴 트리에는 이번 작품에서, 자신의 지난 영화들에서 다루었던 인간의 정체성 혼란과 기억의 왜곡, 그리고 사회적 제도 내에서의 한계라는 주제를 한층 더 심오하게 확장시키며, 우리에게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상처와 기억, 그리고 언어의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단순한 사건 해석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복잡한 내면과 사회적 제도의 한계를 고찰하는 동시에, 진실이라는 개념이 결국 당사자 외의 이들에게는 체감하기 어려운, 오직 시간 속에서 점점 오염되어 가는 유동적인 것임을 예술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보다 "왜"를 묻는 다니엘의 마지막 발언은, 우리 모두에게 완전한 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재해석되는 진실의 파편들을 통해서만 그 조각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진실은 재현 불가능하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사진=그린나라미디어


마지막으로, 영화는 법정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가족이라는 개인적 역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통합된 진실의 부재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단순히 범죄와 법적 논쟁을 넘어서, 인간의 기억, 언어, 정체성이라는 복합적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미로 같은 진실의 해부학을 탐구하며, 우리에게 그 속에 감춰진 다층적 의미를 여운으로 남긴다.


온 국민이 사법적 경험치가 비자발적으로 향상된 요즘이다. 영화 <추락의 해부>를 보면서 사법 제도라는 절차의 불완전성을 다시 한번 느낀다. 적어도 사건의 진실은 해석이 최선이지 재구성하여 재현할 수 없다는 진리를 얻어 갈 수 있다. 얼마 남지 않은 판결 선고에 대해서도 한 발 물러서 바라 보려 한다. 그들은 절대 선하지도 완벽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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